Dec 27, 2013

13년. 상처와 아물기.

 올 여름 크게 다쳤다. 외상이었다. 오른발목쪽의 정맥이 잘리고 근육과 힘줄과 인대가 모조리 다 끊겼으며 신경도 절단된 상태였다. 사고 후 두시간 반가량이 지나서 수술대에 오를 수 있었다. 사고가 일어난 날이, 일요일 아침이었던걸 감안하면 운이좋은 편이었다. 접합수술은 하반신 마취후 이루어졌다. 마취를 할때, 수술대에 오른 환자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척추쪽에 주사를 맞고 서서치 하반신의 감각이 사라지는걸 느낀다. 이때가, 가장 두려운 순간이다. 수술을 받을때는 몸을 큰 대자로 벌리고 수술대에 오른다. 수술은 약 세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심신이 지쳐서, 수면 가스로 잠을 청했으나, 예상보다 잠이 일찍깨어 집도하던 의사들이 놀랐었다. 고통과 놀람, 두려움속에서 수술이 끝나갈 때 의사들에게 몇번 씩 던진 질문이 기억이 난다 "다시 수영하고 마라톤을 할 수 있나요? 스키를 탈수 있을까요?"

 입원기간은 약 3주였다. 절단된 부위와 수술의 무지막지함에 비하여, 병원 생활과 치료과정은 상당히 단조로웠다. 내가 있었던 8인실은 대부분 중장년층과 노인들이었고, 6시 30분에 기상해서 10시 30분에 잠드는 라이프 사이클이었다. 수술후 이틀간은 사고와 수술의 아픔과 공포로 몸져누웠지만, 삼일째 아침부터는 생각을 조금 고쳐먹었다. 몸을 굴려먹기로 했다. 담배를 끊기로 하였다. 피로감으로 드는 낮잠은 허용하였다. 하지만 무료함으로 인한 수면은 경계했다. 맛이라곤 찾을 수 없는 저염식 환자식단을 빠지지 않고 먹었다. 아침 점심 저녁, 병원에서 주는 음식말곤 입에 대지 않았다.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면서 싸들고온 과자와 음료수는 그대로 다음번 찾아온 다른 사람들에게 건냈다. 병원에서 주는 것 외에 따로 챙겨 먹은 건 오직 식사후 의무적으로 챙겨먹었던 아몬드였다.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 식사 후 무조건 직접 휠체어를 몰고 병원1층 로비옆에 있는 편의점에서 신문을 직접사서 읽었다. 꾸준히 꼬박꼬박 책을 읽었다. 입원해서 읽은 책은 정말 잘 읽힌다는걸 다시한번 깨달을수 있었다. 매일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양치질은 다섯번씩하였다. 부러 가족들의 병간호를 다 물리쳤다. 혼자 있는게 더 평온했다. 이 모든 것들은 신체의 구속에서, 내가 할수 있는 자기 방어이자 재활의 첫번째 스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은 찾아오고, 밤마다 불안에 시달린건 어쩔수 없었다. 낮동안 잠잠하던 고통들이 밤이되면 꾸물럭거리며 발에서 다리로, 다리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전신을 점령했다. 수술 후 일주일동안은 아파서 깊은 잠을 자지 못했고, 그 뒤 일주일은 불쾌한 생각들이 단잠을 방해하였다. 그것들은 자기들끼리 새끼를 쳤다. 불안함 뒤로 외로움이 엄습했고 외로움뒤엔 분노와 두려움이 병렬로 나를 방문했다. 기도를 할까 했지만 기도할 대상이 없었다. 기도대신 자기다짐을 하였다. 아프고 외로운 밤들이었다. 다른 환자들과, 그들의 보호자들이 자면서 뒤척이는 소리와, 신음소리가 적막을 깰 수 있었다. 8인실이 마음에 드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잠이 깨거나 혹은 생각으로 뒤척일 때면 정신을 비우고 잘린후 꿰맨 정맥으로 피가 지나가고, 다시 근육조직이 엉겨붙고 환부의 인대와 힘줄이 빳빳하게 당겨지며 새로이 매듭짓는 상상을 했다. 도움이 될지 안될지는 모르지만, 그것만이 할수 있는 전부였다.

 몸이 재생되고, 살이차오르고, 다시 뛰고 걷게되는 상태까지 근육과 인대가 가다듬어지는 상상을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매일하기로 했다. 근육의 결과 골격의 구조는 모르지만 도움이 되길 바랄뿐이었다. 일주일이 되어갈 무렵부터 운동을 하였다. 다리는 쓰지않고, 윗몸일으키기와 푸쉬업과 이두근과 삼두근 운동을 하였다. 운동기구가 없어 병문안온 사람들이 가져온 병음료수 통을 썼다. 어깨운동을 하기위해 적당한 무게감의 아령의 대용품을 찾을 때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열대'와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 전기가 눈에 들어왔다. 꽤 괜찮은 대용품이 되었다. 운동은 아침을 먹고 오전시간에 한 타임, 점심을 먹고 오후 시간에 한타임씩 하였다. 하루에 두번씩 붕대를 감은 다리를 이끌고 샤워를 할 수는 없으니 오후 시간에 본격적인 운동을 하였다. 입원 후 일주일이 지나니 나트륨과 쓸데없는 탄수화물섭취를 줄이니, 몸의 붓기가 빠지는걸 느낄수 있었다. 병문안을 오면 항상 웃었다. 재밌고 쾌활한 이야기만을 하였다. 나의 성격이 원래 그러했지만, 의도하였다. 친구들을 웃기고 간호사들을 웃기려하였다. 부상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나에게 가장 큰 동료는 "젊음"이었고 다음이 "긍정"이었다. 웃기위해 노력했다.  

 삼주간의 입원기간동안 즐겨마셨던 맥주보다, 10여년을 넘게 태운 담배보다, 기름진 음식보다 생각나는건 진한 커피였다. 커피믹스말고, 커피샵에서 파는 커피. 아침에 일어나 생각나고, 운동을 하고나서 생각났고, 휠체어에 앉아 병원 옥상에서 해지는 저녁놀에 또 생각났다. 병원밑에 커피샵이 없어 은근히 구하기 어려운 음식이 된 커피를, 친구들이나 지인들한테 올때마다 항상 부탁했다. 아메리카노로, 진하게, 큰 사이즈로. 내가 카페인에 절여져 살았다는걸 입원을 하고서야 알게되었다.

 난 내 몸의 살들이 아물고 근육이 붙는 속도와 신비에 경악했다. 뼈만남은채 덜렁거렸던 부위는 공업용 미싱에 재봉당한 듯이 꼼꼼하게 꿰매지고, 다시 힘이 들어가고 감각이 돌아오는데에 보름이란 시간이 걸렸다. 절반은 젊어서고, 나머지 반은 평소의 운동과 몸상태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신체에 감탄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보름이 지나서야, 잠을 푹잘수 있었다. 밤늦어 병원침대 위에 누워서 엄지발가락을 까닥거릴때의 그 안도감, 감사함. 그리고 퇴원이었다. 퇴원 후, 깁스를 풀기전까지도 꾸준히 운동을 하였다. 저염분의 식사도 최대한 지키려 하였다. 강한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상상으로 다리가죽 밑에 있는 온갖것들이 치유되고, 정상으로 돌아오는 상상은 멈추지 않았다. 자기전 침대에 누워서 계속해서 상상했다. 

 수술은 잘 된 편이었다. 아니, 상당히 잘 된 편이라고 해야할것이다. 그래야 수술을 집도한 의사들에 대한 나의 감사함이 조금이라도 표현될것이다. 수술후 한달 뒤, 엄지에서부터 발목부근까지 사라질거라는 발등위의 감각은 다시 돌아왔다. 수술후 두달 뒤, 매일 3km씩 걸어도 다리가 멀쩡했다. 수술 후 세달 뒤, 다시 6km정도를 쉬지않고 내달렸을때,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몇달 만에 뛰어 놀란 심장과 근육과 내 호흡사이에, 그 사이에 잘린 내다리가 온전히 붙어있음이 너무도 고마웠다. 초가을날 저녁, 수영강변 저녁놀, 나의 오른발 - , 내것들아-

재활은 끝났다. 성공이었다.  










Dec 21, 2013

12.21

 인간이란 천국에 들어서기엔 너무 민망하고 지옥에 떨어지기엔 너무 억울한 존재들이다. 실은 누구라도, 갈 곳이 없다는 얘기다. 연명의 불을 끄고 나면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 박민규

Dec 13, 2013

초대

The Invitation
                            by Oriah

It doesn’t interest me what you do for a living. I want to know what you ache for and if you dare to dream of meeting your heart’s longing.

It doesn’t interest me how old you are. I want to know  if you will risk looking like a fool for love, for your dream, for the adventure of being alive.

It doesn’t interest me what planets are squaring your moon...I want to know if you have touched the centre of your own sorrow. if you have been opened by life’s betrayals or have become shrivelled and closed from fear of further pain.

I want to know if you can sit with pain mine or your own without moving to hide it or fade it or fix it. 

I want to know if you can be with joy mine or your own if you can dance with wildness
and let the ecstasy fill you to the tips of your fingers and toes without cautioning us to be careful,to be realistic, to remember the limitations of being human.

It doesn’t interest me if the story you are telling me is true.
I want to know if you can disappoint another to be true to yourself.
If you can bear the accusation of betrayal and not betray your own soul.
If you can be faithless and therefore trustworthy.

I want to know if you can see Beauty even when it is not pretty every day. And if you can source your own life from its presence.

I want to know if you can live with failure yours and mine and still stand at the edge of the lake and shout to the silver of the full moon, “Yes.”

It doesn’t interest me to know where you live or how much money you have. I want to know if you can get up after the night of grief and despair weary and bruised to the bone
and do what needs to be done to feed the children.

It doesn’t interest me who you know or how you came to be here. I want to know if you will stand in the centre of the fire with me and not shrink back.

It doesn’t interest me where or what or with whom you have studied. I want to know what sustains you from the inside when all else falls away.

I want to know if you can be alone with yourself and if you truly like the company you keep in the empty moments.

Dec 4, 2013

어느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 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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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의 비열한 거리와 말죽거리 잔혹사도 괜찮았지만, 나에게 그는 이 시의 시인이다. 언제나 좋아하는 시. 싱가폴 국립대학에서의 간담회중 너무 심심해서 적었었다. 이 농땡이의 풍경. 인천으로 오는 아시아나 항공편에서 30분정도 잠깐 선잠에 들었었는데. 꿈에서 난 사막에서 밀을 거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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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리라
바람도 찾지 못하는 그 곳으로
안개비처럼 그대가 오리라
어느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모래알들은 밀알로 변하리라
그러면 그 밀알로, 나 그대를 위해 빵을 구우리
그대 손길 닿는 곳엔
등불처럼 꽃이 피어나고
메마른 날개의 새는 선인장의 푸른 피를 몰고 와
그대 앞에 달콤한 비그늘을 드리우리
가난한 우리는 지평선과 하늘이 한몸인 땅에서
다만, 별빛에 배부르리

어느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빗방울처럼 그대가 오리라
그러면 전갈들은 꿀을 모으고
낙타의 등은 풀잎가득한 언덕이 되고
햇빛 아래 모래알들은 빵으로 부풀고
독수리의 부리는 썩은 고기대신 꽃가루를 탐하리
가난한 내가 보여줄수 있는 세상이란 오직 이것뿐
어느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지평선과 하늘이 입맞춤하는 곳에서
나 그대를 맞으리라


싱가폴에 대한 단상들 2

싱가폴은 철저하게 레벨별로 학생들을 나눈다. 학생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성적으로 나눠지며 (이건 여느나라와 같지만) 그 경쟁과 그에 따른 결과가 중학교때부터 나타난다. 더불어 싱가폴 학생들의 성적은 하나의 히스토리化 되어 계속 주인을 따라다니게 되는데, 징병제인 싱가폴에서, 군에 입대하였을때의 병과배치또한 중고교 성적이 많이 좌우한다.

싱가폴 대학생들은 전쟁같은 입시를 통과하여, 다시 지옥같은 졸업까지의 경쟁레이스를 거쳐나간다. 이들은 공부를 매우 열심히하며, 싱가폴 국립대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라면 기본적으로 영어나 중국어 둘 중에 하나는 완벽하게 구사하고, 나머지 한 언어도 능숙하게 다를 수 있을것이다. (대학생들과 몇번 대화를 해보았지만 다들 영어실력이 뛰어났다)

다만, 이러한 철저히 뜰채로 걸러내는 엘리트중심주의 교육에서 과연 전환적인 발상을 할 뛰어난 리더가 나올 수 있겠냐는 문제다. 아직까지 싱가폴은 매우 성공적으로 발전해왔고, 당분간 계속 그 지위를 누릴 수 있겠지만, 우회로가 차단된 이 사회가 주는 느낌은 매우 갑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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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폴은 리콴유가 30년째 넘게 독재를 해왔고, 퇴진 뒤 리콴유의 심복인 고촉통이 10년을 넘게 수상직을 수행하다가, 다시 리콴유의 아들인 리셴륭이 3대 수상짓을 하고 있으며, 싱가폴 최대 국영회사의 CEO는 리셴륭의 아내이자 리콴유의 며느리인 호칭이 맡고 있다.

처음보는 이방인에게 자국의 정치인들 욕을 자랑스럽게 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누가보아도 불합리한 자국의 정치제제에 대하여 말을 높이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싱가폴 대학생들 조차도 의견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난양기술대학 네트워킹 자리에서 만난 외국인들이 이 현실에 대해 성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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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폴은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다. 창이국제공항에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호텔로 들어오면서 보인 거대한 빌딩숲들은 자신있게 말하고 있었다. 리콴유의 유교적 가부장적 리더십과 청교도적 국가통치관념도 유효했다고 지표와 통계는 말하고 있다. 성공적인 정책과 천혜의 지리 덕택에, 싱가폴은 반백년동안 엄청난 경제적인 성장을 해왔고, 인류사에 베네치아 다음가는 도시국가를 건설할수 있었다.

한국이 음식으로 치자면 끝모를 경쟁과 공포마케팅이라는 재료로 끓여내는 지옥 가마솥탕이라면, 싱가폴은 국가사회주의와 청교도주의로 서서히 중불로 익혀내는 음식이다. 둘다 그럭저럭 잘팔리고 있지만 치뤄야 할 값은 비싸며, 뒷맛이 조금 씁쓸하다.

싱가폴에 대한 단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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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폴의 면적은 710 제곱키로미터이고 인구는 510만명이다. 부산시보다 약간 작은 면적에 510만명의 사람이 살고있다. 기후는 일년내내 열대성 온난다습기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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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지가 정말 잘 조성되어있다. 도시 구획마다 첨예할 정도로 나무를 심고 식물을 가꿔놓은게 느껴진다. 도심지를 벗어나 외곽도로를 타고 본 도시의 아웃스커트나, 자연보호구역 또한 관리가 안된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것은 싱가폴이 내세우는 첨단화된 현대도시와 공존하는 '자연친화적 관광도시'와 부합하는 조건일듯.

놀랐던것은 다른 동남아국가들과 다르게 싱가폴에서 겪은 4박5일 동안 단 한마리의 벌레를 마주치지 못했다는것, 더불어 개나 고양이같은 동물또한 볼 수 없었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시장거리나 주택가에서 마주친 고양이는 단 한마리뿐) 벌레가 없었다는 건 국가단위의 방제사업이 잘되었다는 이야기일테고,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이 안보였다는건 규제가 상대적으로 심하다는 뜻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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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었던 호텔에 한국여직원과 새벽에 수영후 잠깐 잠깐 대화를 할수있었다. 부산에 있는 동아대학교를 졸업하고, 호텔에 취직하였다고 한다. 내가 묵었던 호텔은 리츠칼튼이나 하야트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꽤 괜찮은 호텔이었다. 호텔에 면접을 볼 때 다른 영어점수는 보지않고 오직 영어 인터뷰로만 진행이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중국어를 할줄 몰랐다.

좀 있으면 한국으로 휴가를 떠날 예정이라는데, 휴가는 날짜와 시즌에 상관없이 무조건 3주라고 한다. 싱가폴은 관리직이 아닌 호텔여직원도 3주의 유급휴가를 눈치없이 사용 할 수 있다. 싱가폴과 한국의 공통점은 유교적 가부장주의와 청교도논리가 사회를 억누른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일자리와 그 처우에서 나타난다. 더불어, 사회전반에  걸쳐 여자들의 승진과 처우가 좋다는 느낌. 그녀는 일한지 1년이 채 안되어서 프로모션을 유의미하게 기다린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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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화려하거나 타국민에게 보여줄 법한 거리가 없는 역사적 순간을, 싱가폴은 스토리텔링으로 메꾸어갈려고 한다. 부산보다 약간 작은 면적에서 가는 관광지의 기념품샵마다 머라이온이라는 사자의 대가리와 인어(라지만 생선처럼 생겼다)를 합친 캐릭터 상품이 넘쳐난다. 차이나타운과 길거리의 시장에서도 마찬가지. 그리고 생각보다, 꽤 잘 먹혀 들어가는 듯.


Nov 19, 2013

후회가 없는 남자

 “1년 더 현역 생활을 이어간 뒤 그만둘 것”이라고 말했던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아내가 묻습니다. 아쉽지 않냐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더 열심히 할텐데 하고 후회되지 않냐고”라고 페이스북 글을 시작한 이영표는 “제가 답했습니다. 아쉽지 않다고. 과거로 돌아가서 또 다시 매일처럼 반복되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좌절감 속에 다시 서고싶지 않다고.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 때처럼 열심히 하기 힘들 것 같다고. 스스로에게 충분히 정직했다고. 그래서 지금이 좋다고 답했습니다. 지난 주부턴 이상하게 날자를 세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오늘은 운동이 끝났으니 이제 두 번의 훈련과 한 번의 경기만 남았습니다”라고 은퇴 경기를 앞둔 심경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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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게 충분히 정직한 사람

Nov 11, 2013

79년생 친구가 처음으로 연애를 한다

지금은 오지 않는다
어쩌면 내일도 오지 않는다

한낮의 열렬함을 기억하던
나스르르한 청춘은 젖은 풀잎으로 눕고

사랑이다 싶었던 사랑도
사랑 아니게 되는 기억의 실어증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희망은
쉼없이 거듭나 나분작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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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다 그 기분. 가을찬바람 상쾌하고, 바람불어 빨간 귀도 따듯할 그 케미. 데이트의 시행착오. 밤 늦어 누웠을때 허리부터 퍼지는 충만감. 눈 떠 일어날때의 자신감. 손잡을때의 서로 손금가득 들어찬 땀들. 3분마다 전화기 바라보게 되는 자발적 구속. 홀로 외롭지 않다는 - 나아닌, 친구아닌, 가족아닌 남으로 부터 느끼는 생전 모를 소속감. 충실하고 싶었던, 할법도 했던 감정의 후쿠시마 원전사태.

Sep 30, 2013

면후심흑, 둔필승총

面厚心黑

얼굴은 두껍고, 마음은 검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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鈍筆勝聰

둔감한 붓이 머리를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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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bris would anger the genie

오만은 지니를 화나게 한다

Sep 26, 2013

멋진 사내들



세명중에서 개인적으로는 파바로티지만, 두 사람다 좋다. Nessun Dorma는 특히나 플라시도 도밍고의 감정이 떡고물처럼 떨어지는게 너무 좋았다. 그가 그리운 금강산을 불렀을 땐, 한국인 성악가보다 발음이 더 좋아서 너무 놀랐다. 아 멋진남자들.

Sep 23, 2013

정성일 트위터 중에서

 비밀_ 리스트를 연주할 때 모두들 기교에 대해서 말하죠, 내가 리스트를 위해서 피아노 앞에 앉을 때 항상 생각하는 것은 단 한가지 입니다. 침묵. 리히테르.

시작_ 오늘 들은 말. 살이 찌기 시작했다는 건 삶의 일부가 망가지기 시작했다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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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가 아니더라도, 메모하는 습관을 들어야겠다.

살인자의 기억법

짧고 간결하다. 김영하라는 음식이 있다면 정말 필요한 부분 부분만 모아놓은 미니 도시락같다. 생각보단 나쁘진 않았지만, 역시 김영하는 검은꽃이다. 검은 꽃의 에필로그는 너무 좋았다. 역사와 인생. 짖궂은 농담. 계속되는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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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이 왔어, 그 친구 과테말라에서 죽었다는 군'

박정훈이 편지를 전했다. 연수는 처음에는 입을 꾹 다물고 얘기를 들었으나 편지를 읽고 나선 울었다.

'여기 왔었군요'

박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머리르 깎아주고 면도도 해주었소
연수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는 울지 않았다. 박정훈은 삼년 후 이발을 하다 심장마비를 일으켜 급사했다. 이연수는 박정훈의 돈으로 고리대금업을 시작 했다. 몇년 만에 그녀는 베라크루즈에서 아무도 넘볼 수 없는 큰 손이 되었다. 그녀는 곧 멕시코 시티로 올라가 극장을 겸한 술집 몇 개를 사들이고 무희들을 고용했다. 그녀는 유흥가의 거물로 성장해 어떤 자선사업도 벌이지 않고, 어떤 종교에도 의탁하지 않고, 오직 갈퀴처럼 돈을 긁어모으는 일에만 전념했다.

경찰과 행정 당국은 그녀에게 매출알선 혐의를 적용하려 여러번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하였다. 그녀는 75세의 나이로 멕시코 시티에서 죽었다. 모든 유산은 그녀의 아들 박섭이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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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 14, 2013

태양은 가득히, 알랑 드롱과 이병헌


몇 년이 지나서 다시 본 르네 끌레망의 '태양은 가득히'에서도 결국 기억에 남는건 햇빛에 등짝을 다 그슬린 알랭 드롱의 상체뿐이다. 아니, 원래부터 지중해에서 그리스 조각같은 알랭드롱을 보기위해서 간셈이었다. 천박함과 뻔뻔함, 기만자와 어린아이의 표정을 동시에 품은 그의 얼굴과 몸짓은 스트레이트인 내가 봐도 숨이 턱,하고 막혔다. 알랭 드롱은 배우가 캐릭터를 잡아먹는 배우이다. '태양은 가득히'를 보고나면 리플리라는 캐릭터보단 요트를 몰던 '알랭 드롱'이 기억에 남는다. 다른 영화에서도 그는 원래 그랬다. 장 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를 보고 난 뒤엔 트렌치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매만지던 알랑 드롱이 판화처럼 새겨졌으며, '암흑가의 두 사람'에선 단두대에서의 마지막 그의 얼굴만이 영화의 전부였다. 그의 인생사와 성격이 원래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경찰보단 악당을, 좋은 집안의 아들보단 비루한 출신 성분의 캐릭터를 연기할때 맞춤양복을 입은 듯 했다. 잘생기긴 했지만 귀공자와는 거리가 멀다, 마초적이지 않은 얼굴이지만 상스럽다. 이건 연기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본디 가지고 태어나는 성질같기도 하다.

태양은 가득히를 한국판으로 어레인지 한다면 리플리 역은 이병헌이 맡아야 한다. 라고 친구들과 술먹을때 우긴적이 있었다. 글을 쓰며 찾아보니 박찬욱감독도 이병헌이 한국의 알랑 드롱이라는 말을 한적이 있었던 걸 보면 내가 헛소리를 한건 아닌듯하다. 이병헌의 목소리와 연기력을 떠나서, 잘생긴 얼굴을 감안하면 동년배의 한국배우 중 가장 넓은 연기의 폭을 가졌다. 그는 가진자와 못가진자, 배운 이와 못배운이, 선함과 악함을 모두 소화할 수 있다. 하얀색 옷입고 수리검 날리는 지극히 만화스러운 닌자와, 최지우의 실땅님과 번지점프의 인우를 (비록 세월의 갭이 있지만) 그는 빠지는거 없이 해낸편이다. 그리고 어떤 역을 맡더라도 눈알 저편에 깔린 강렬한 에고는 스크린에 투사된다. 이것이 알랭드롱과 이병헌의 교집합이다. 햇빛에 다 뒤집어진 등짝으로 바다를 쳐다보던 리플리의 눈빛은, 이병헌만이 대체할수 있을 것이다.

이병헌의 출연작 중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가장 이병헌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던건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이었다. 고급양복을 입은채 건물꼭대기 층에서 쉐도우 복싱을 하던 그의 모습에서 보이던 나르시즘과 에고는 연기가 아니라 본인의 실제 모습일거라 생각했다. 캐스팅을 잘하고 캐릭터에 맞게 잘뽑아낸 감독의 역량도 훌륭하지만, 영화에서 비친 선우의 모습은 배우 본인이 자존감과 나르시즘없이는 그 몰락이 그만큼 처절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면 잘난척해도 된다.


중경삼림



결막염 때문에 눈을 감을 때마다 눈에서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감기까지 얹혔다. 한 시간정도 달리기를 하고 더운 땀을 빼니 갑자기 미식거리며 식은 땀이 비질비질 세어나왔다. 택시를 타고 영화의 전당에 도착했다. 처음 앉아본 야외 극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이 훨씬 많았다. 가족들과 연인들끼리 온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괜찮은 자리를 발견한건 행운이었는데, 음식을 들고온 관객들이 많았다. 감기몸살로 솎아낸 빈속을 족발과 치킨과 햄버거와 김밥냄새가 뒤집기 시작했다. 같이 달려온 무우냄새가 결정타였다. 속이 울렁거렸다. 들고온 커피가 아니였다면 화장실로 달려가서 토해버렸을 것이다. '아.. 괜히 왔구나', 영화가 시작했다.

금성무가 헐레거리며 뛰어다니고, 임청하와 어깨를 부딪히고, 다시 things in life가 나오는 술집에서 트렌치코트를 입고 가발을 쓰고 선글라스까지 낀 임청하가 담배를 핀다. 뒤집힌 속과 통닭냄새가 신경쓰이지 않았다. 페이와 양조위가 식당에서 마주치는 순간, 이 영화를 보러오지 않았다면 다시 몇 년을 후회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California Dreamin이 나올 때, 갑자기 울컥거리면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양가위한테 무장해제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이 사람은 영화를 이렇게 간드러지게 만들까.

97년 반환을 앞둔 홍콩의 세기말적 정서가, 곧 왕가위 영화의 근본이었다. 정서적 과잉과 눈이 뽀개질 정도의 아름다움, 현실에서 한 걸음 살짝 비켜선 인물들의 대사는 전부 종말을 선고받은 이의 공허의 감성에서 출발한다. '화양연화'와 '중경상림'이 그랬고 '아비정전'과 '동사서독'이 그랬듯이, 왕가위는 운명론적 허무주의에서 발버둥치는 사랑과 인간의 군상들의 동어반복을 이야기했다. 그게 왕가위의 한계이고, 동시에 가장 보는 이의 흉부를 먹먹하게 만드는 점이었다. 홍콩은 반환된지 십수년이 넘었고, 58년 개띠인 왕가위는 초로의 입구에 서있다. 그래도 아직 그의 영화는 여기저기서 틀어지고 있고, 장면들마다 피어나는 거리와 연인의 풍경에서 솟아나는 울림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건 세월에 관계없이 결국 세상에 쓸려간 사람들의 생애는 비슷한 단면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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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경삼림은 다시 볼 수록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만일 당신이 새로운 21세기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당신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중경삼림은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영화입니다. 혹은 질문하는 영화입니다. 제 생각에 중경삼림은 1990년대에 만들어진 최고의 연애영화입니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 혹은 곧 사랑하게 될 사람들, 또는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막 헤어진 사람들이 마치 치료하듯이 보아야할 영화라고까지 말하고 싶습니다. 혹은 우리 시대의 사랑하는 방식에 관해서 말하는 영화, 그러니까 중경삼림은 훗날 20세기의 마지막 10년동안 이 20세기의 마지막 연애방식에 관해서 말하는 영화라고 기억될 것입니다. 중경삼림은 한 마디로 사랑에 관한 영화입니다. 이제 막 시작될 사랑, 막 떠나간 사랑, 하여튼 그 사이에 있는 시간에 관한 영화입니다. 감사합니다. - 중경상림 DVD 정성일 코멘터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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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많은 장면들이 좋지만, 저에게 중경상림에서 가장 압권은 양조위가 가게에서 지나간 애인의 편지를 읽지않고 블랙커피를 마시는 장면입니다. 카운터에 기댄체 아무말도 하지 않는 페이, 커피를 마시는 양조위, 지나가는 사람들, 이 짧은 순간의 침묵에서 흘러나온 사랑의 풍경.



Sep 3, 2013

숨바꼭질 - 불편하며, 게으르다



<숨바꼭질>에서 최종적인 악인, 즉 가장 공포스럽고 흉물스러운 존재는 능력도 안 되면서 중산층을 욕망하며 자기도 가지겠다고 ‘생떼거리’를 쓰는(용산구청에 나붙었던 플래카드의 문구) 가난하고 촌스러운 자들이다. 돈도 없으면서 집을 탐하다 하우스푸어가 된 자들, 능력도 없으면서 사교육을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사람들이 가장 무섭고 끔찍하며 사회의 안전을 해치는 족속이라는 것이다. 성수는 주희의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을 간파하고, 이를 이용해 회유한 뒤 불태워 죽인다. <숨바꼭질>은 중산층 상부가 자신들에게 따라붙으려는 중산층 하부와 서민들에게 윤리적·미학적 비난을 퍼부으며, 따돌리고 밀어내어 자멸시키는 계급적 무의식을 반영한 영화이다.

마침내 우아하고 새치름한 중산층 마나님인 성수의 처가 촌스럽고 우악스러운 주희를 내려친다. 뒤늦게 도착한 성수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온한 싱글맘 주희의 숨통을 끊어 처자식을 구해낸다. 객석에선 환호가 터진다. 객석을 중산층 정상가족의 무의식으로 대동단결시킨 영화적 힘에 감탄해야 할지, 반동적 허위의식에 혀를 차야 할지 아련해진다.

http://www.entermedia.co.kr/news/news_view.html?idx=2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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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생업이 아닌, 취미로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영화를 볼 때 그 영화가 정말 엉망이라면 가장 분노하는 대상은 자기자신입니다. 많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그럼 필연적으로 함량 미달의 영화가 나오겠지만, 왜 난 내 선택에 의해 내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 이런 개같은 영화를 보고있나 생각하다보면 내 선택이 후회스럽고, 그런 선택을 한 내 자신에 대한 화가 솟아납니다. 좋은 영화를 보는건 그렇다치고, 후진 영화를 골라내서 피하는건 꽤 자신있다고 생각했지만, 오랜만에 본 스릴러 한국영화인 숨바꼭질은 다시 한번 나 자신에게 화가나는 경험을 하게 해준 영화입니다.

영화의 공포의 근원은 첫번째로 익명을 뒤집어쓴 도시공간에서의 공포로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간과 강도와 살인의 공포와 마주한채 살아가고, 비극은 매일 일어나니까요. 설득력있고 무섭습니다. 전 남자지만 여자관객들이 처음 나오는 엘리베이터 장면을 볼땐 정말로 온몸에 털이 돋는, 하지만 종종 겪을 법한 상황이기에 많은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겁니다. 영화는 스리슬쩍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공간에서의 비극대신(위에 링크한 글에선 아파트호러라고 하더군요. 일리있습니다.), 계급적 질서의 대변과 충돌로 바꿔 넘어갑니다. 괜찮습니다 정치적 견해가 좀 구리긴해도, 정치적으로 후지다는게 꼭 영화자체가 후지다는 소린 아니니까. 자기 보금자리를 위협받는 중산층의 공포감과 경계심을 재료를 삼은 수많은 걸작 영화들이 그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매우 노골적으로 불쾌하면서도, 연출도 매우 게으릅니다. 날로 먹으려듭니다. 한국 드라마에서 쓰일법한 촌스런 음악(죄송, 하지만 이 표현말곤 생각나지 않더군요)으로 관객들한테 공포감을 갖도록 구걸하고, 누가 봐도 상상이거나 꿈이 분명한 장면들을 아무런 고민없이 중간에 턱턱 넣어버립니다. 보여주는 캐릭터의 심리와 묘사는 배우가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결국 허접스런 각본의 한계인지 이물감만 느껴지고,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모르는 극의 완급은 놀래킬려고 애쓰는 장면과 배우들의 하얀 눈알로 메꾸려듭니다. 개연성과 상식에 준한 그의 논리는 애초에 기대안했습니다. 제가 더 짜증나는건, 이 영화가 한국에서 부동산이 차지하는 상징을 골수부터 체험하며, 그 욕망에 충실한 중장년층 관객들에게, 꽤나 그럴싸하게 먹힐거 같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영화보다 더하게 정치적으로 저한테 불편한 영화는 부지기수일꺼고, 더 게으르며 나태한 영화도 수두룩하겠죠. 결국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제 자신에게 화가나서 입니다. 전 왜 하필 오늘 오후 남는시간에 서점을 가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버스 종점을 찍는 짓을 하질 않고 적지않은 돈을 내고 이 영화를 보았을까요. 또 하나의 노동자로써, 이 영화에 종사한 사람들의 노동들이 사탕발림이나 잡소리 없이 그들에게 정량적인 돈으로 돌아가길 바랄뿐입니다.


Aug 5, 2013

그랑블루, 가장 아름다운 염세주의 영화


"고아가 된 주인공의 목표는 지상을 떠나 더 깊이, 더 오래 잠수하는 것입니다. 그는 친구와의 우정을 회복하고,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고, 이제 그녀가 아이를 낳고 가정을 가질 수 있게됩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해피엔딩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주인공은 이 모든 것이 돌고래와의 우정만도 못한것이라 생각하고, 바다로 뛰어들고 한없이 빠져듭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염세적 비관주의입니다" - 정성일, 1993년 정은임의 영화음악

사람이 결핍에 대처하는 데에는 크게 두가지 반응이 있다고 봅니다. 하난 그 결핍의 근원을 컴플렉스로 만들던 지상목표로 만들던 내연기관처럼 끊임없이 폭발시켜 일생에 걸쳐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결핍으로 상실된 부분을 다른 무언가로 집어넣어 메꾸려는 겁니다. 사람들은 때에 따라서 다른 반응들을 보이는데 그랑블루의 주인공 자크는 어머니가 떠나고, 아버지가 바다에서 죽었던 유년의 상처를 끊임없이 다시 바다로써 메꾸려합니다. 그건 집착이나 편집증이란 단어론 설명되지 않는, 기갈이란 단어와 비슷합니다. 자크에게 바다는 기갈입니다.

 엔조는 타고난 잠수부입니다. 그의 실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하고, 심지어 다이빙을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엔조에게 다이빙은 격렬한 투쟁의 장소입니다. 꼬맹이시절 동네에서 패거리들을 이끌고 항구바닥에서 동전을 건져올리던 아이가 정말 그대로 큰 모습입니다. 엔조는 잠수를 위해 태어난 인간입니다. 하지만 자크는 조금 다릅니다. 그는 거의 바다에서 잉태된 존재입니다. 어머니가 그를 버리고, 잠수부인 아버지가 바다에서 사고로 죽은건 어떻게 보면 관객에게 붙이는 구구절절한 부가설명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환경이 어떠하였던간에,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과녁에 꽂히듯 결국 자크는 바다로 파고들었을것이다라고 전 생각합니다. 그는 그냥 바다 그 자체에요.

 엔조가 잠수를 하는 이유는 결국 바다위에 있습니다. 그는 동생과 어머니와 수많은 애인들을 부양해야하고, 좋은 양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에겐 바다를 통한 투쟁과 승리가 있습니다. 바다속으로 내려가도,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야합니다. 지상으로 올라와야만이 그가 잠수하는 이유를 만족시키거든요. 엔조는 얼마나 깊이의 숫자에 집착하였나요. 결국 그는 지상에 발을 붙인 존재입니다. 지상에 발을 붙인 엔조가 보기에 자크는 본질적으로 불가해한 존재입니다. 자크는 바다 깊이 들어갔을때, 다시 올라가야할 이유를 못찾기에 힘들어하는 생물입니다. 그에겐 지상에 남겨둔건 결국 지극히 사소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자기 아이마저도. 엔조가 자크를 어릴때부터 의식하며 챙겼던건, 어쩌면 친구에게서 느낀 미지감과 동경때문이었을 겁니다. 엔조가 바다에서 죽을 때, 자크가 그의 곁에서 그를 해저로 밀어내는 장면은 친구를 떠나보내기 보단, 오히려 인어가 마지막까지 바다와 사투한 사내에게 보여주는 환영처럼 보입니다.  

 자크는 자기 아이가 태어나던, 애인이 도망치던, 친구가 죽던 살던간에 결국 바다밑으로 떠났을 겁니다. 그는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입니다. 세상엔 이런 사람들도 가끔 보이죠. 그에겐 유년시절의 상처론 설명되지 않는 태생적인 결여가 있습니다. 차라리 그는 그냥 돌고래로 태어났어야 했습니다. 그럼 여러사람 덜 피곤했을겁니다. 결국 지상위에 온갖 하찮은 것들을 뒤로 하고 그는 자기가 원래 있어야 할 '거대한 청색'으로 쏠려갑니다. 저같은 보통의 인간들은 조안나처럼 저게 뭐하는 짓거리인가... 하고 바라볼수 밖에 없어요. 그리스 돌섬과 안데스산맥과 뉴욕을 거쳐 다시 바다로 쏠려내려가는 여정에 썩 공감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헌데 살다보면 가끔 이해못할 아득함과, 존재론적 단독감(고독은 정서적인 말이 들어갔다고 김훈이 그러더군요, 그래서 단독이라 씁니다)이 들때가 있죠. 뱃속에서 무언가 웅컹거리면서, 난 우리엄마 자궁에서 나왔는걸 분명알지만 난 왜 여기서 이렇게 태어나 살고 있는가하는 무력감, 세상 앞에 초라해지며 바짝오그라드는 오금, 거기에 뒤따라오는 무력한만큼 무장해제되며, 속수무책으로 헤집어지는 마음들. 살면서 자주 느낄 수는 없더군요. 썩 좋은건 아니지만, 이 알듯모를듯한 그 울렁거림을 다시 느끼기위해 전 스킨스쿠버와 마라톤을 합니다. 그 불가해한 아득함. 미당 서정주가 이 영화를 봤을지는 모르겠지만, 존재론적 고독과 원시적 자연미에 대해 서정주의 시만큼이나 뤽 베송의 영화는 잘 뽑아냈습니다.

그랑블루는 뻥튀겨 만든 나르시즘 염세주의영화입니다.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나르시즘 염세주의영화죠.




Jul 11, 2013

사일런트 마이노리티 - 시오노 나나미,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남자는 멋이없다. 공공성의 긍지.



시오노 나나미가 45살에 엮어 낸 역사 에세이집 '사일런트 마이너리티'에는 환갑을 넘어서 계속될 그녀가 바라는 사내의 격과 조건이 이미 형성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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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후, 이번에는 민주주의의 파도가 밀어닥쳤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파도에도 휩싸인 경험이 없는 나에게는 이 사상 또한 조금도 절대적인 것이 아닌, 그저 인류가 지금까지 생각해낸 여러 사상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파시스트였다가 뒤에 공산주의자가 된 이탈리아의 어느 작가가 쓴 자전적인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것을 읽은 나의 감상은 절대주의 사고를 주입받은 자는 그러한 사고에서 자유로워져도 자유를 누릴 수가 없어, 결국 다른 절대적인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마르크스가 살았다"고 새각했던 사람뿐이다. 나처럼 마르크스가 선량한 사람들의 꿈에서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죽었다'는 말 뒤에  '살았다'고 말할 때와도 같은 감상적인 것이 느껴져, 이 사람들은 어차피 변하지 않았구나 하고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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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가 공개적으로 할복자살했을 때, 나는 어느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할복자살이 아니라 단순한 공개 자살일 뿐입니다. 할복자살은 자기 집 깊숙한 방에서 다다미라도 뒤집어놓고 천황 폐하에게 러브 레터라도 쓴 다음. 조용히 자결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나를 맹렬히 비난한 사람들은 그런식으로 자살을 시도한 작가와 같은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이거나, 나보다 훨씬 아래 세대 사람들이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내가 볼 때 공적(公的)인 사람이다. 공적인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에 느낀 거부감을 정직하게 말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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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는 1937년에 태어났다. 그 해 중일 전쟁이 일어났으며, 태평양 전쟁이 끝난 해에는 여덟 살 이었다. 그녀가 청년의 나이일때 일본의 대학가는 전공투의 계절이었다. 패전 후에도 딸에게 피아노레슨을 시켰던 집안에서 자란 그녀가 본 장면들은 이념의 후진 잔영이었다. 그녀는 이데올로기의 함몰된 남자는 멋대가리가 없다고 말한다. 개인의 삶은 개인의 철학으로 이루어지는 것, 단독자가 내뿜을 수 있는 멋을 그녀는 잡아꺼내 보여준다.

그녀가 보기에 그의 최후는 그의 화제성과 드라마틱한 인생에 비하면 오히려 품격이 떨어졌다. 공개 할복으로 이목을 끌고 계속해서 역사에 회자되겠지만, 결국 그는 그가 주구장창 말했던 가치관과 누렸던 위치와는 주파수가 좀 다른 방법을 택했다. 동의한다.

그녀는 역사를 바라볼땐 일본인 같지만, 개인을 바라볼 땐 유럽인같이 바라본다. 그래서 에세이와 소설로썬 멋있고, 역사로 바라볼땐 맹랑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봐줄만하다. 그녀가 적은 이야기중 눈길을 끄는 것중 하나는 바로 공공성에 대한 높은 가치이다.

카를로 젠이라는 사내가 있다. 그는 25년전 베네치아 해군의 사령관으로써 제노바와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신나게 이겼다. 후에 총사령관 직책과 참모장까지 역임하였고 영국과 프랑스의 대사까지 맡았다. 베네치아 권력의 원 탑인 원수자리 만을 남겨놓은 그는 일전에 점령지의 영주로부터 400두카토 (저택 한채를 살 수 있는 돈이다)를 받았다는 죄로 체포된다. 그의 변호인은 구국의 영웅이자 조국 실력자이며, 여태껏 군대통솔자와 외교담당자로서 조국에 공헌한 그의 업적과 함께, 이 같은 인재를 단순한 스캔들로 매장시켜 버릴 경우에 따라서 올 공화국의 미래의 손실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판결을 담당했던 한 위원의 답이 걸작이다. "위원 여러분, 젠 정도의 인물이라면 그를 재판하는 것이 망설여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재란 이제 태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하는 나라에서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요, 반대로 그와 같은 걱정을 잊고 단호히 판결을 내리는 나라라면 언제고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카를로 젠은 2년 실형에 영구적으로 공직을 박탈당하였다. 그는 출옥후 그럭저럭 잘 살았으며, 10년 뒤 공국은 그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뤄주었다. 죽고 난뒤 시체 위에 덮이는 관뚜껑 재질과 비단색깔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는 명예로운 시민으로써 죽었고, 공동체는 그걸 알아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베네치아 공화국은 그 뒤로도 국가공동체의 황금기를 백여년 누리게 된다. 공화국은 결국 젠을 누락시킴으로써 지불해야 하는 비용보단, 공동체의 정신을 바로세움으로써 얻는 국가적 편익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았고 판단에 따라서 실행했다. 나는 미국이 유례없는 번영을 구가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공공성의 정신과 그것을 믿는 구성원들의 신념이 만들어낸 사회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결국 지금 당장의 비용을 걱정하여, 공공성에 심각한 누를 끼치는건, 대한민국 공화정에 가져올 편익을 앗아간다는 사실. 그리고 비용을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이득을 얻게 되는 사람은 극소수겠지만, 시스템에 돌아갈 편익이 없어짐으로써 손해입을 사람들은 지금 우리와, 미래의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라는 것


Jul 2, 2013

윤동주 - 울적(鬱寂)

처음 피워본 담바맛은
아츰까지 목않에서 간질간질 타.

어제밤에 하도 鬱寂(울적)하기에
가만히 한대픠워 보았더니

一九三七, 六

흡연을 이렇게 한국어로 알싸하게 표현한 구절은 많지 않을 것이다. 1937년 윤동주는 20살 나이로 광명중학교 졸업반이었고, 아버지와 진로때문에 다투었으며, 식민지의 청년이었다. 아침까지 목안에서 타오르는 간질함. 



Jun 25, 2013

몸을 씻지 않는 사람부터 죽었다 - 생존자 中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한 그 순간, 나는 마치 미몽에서 깨어난 것만 같았다. 나는 내 밑바닥으로붙 나오는 '살아야 한다'는 명령을 들었다. 설사 내가 만일 아우슈비츠에서 죽는다고 해도 나는 '인간'으로서 죽을 것이며 끝까지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킬것이다. 나는 결코 놈들이 원하는 대로 비천하고 더러운 짐승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난 후로는 무서운 투쟁이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_ 레빈스카Lewins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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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내재적으로 지닌 가장 강력한 생존도구 중 하나는 바로 자존감인것이다. 스스로를 존엄하게 여기는 태도, 이건 교양이나 학식과는 또 다른 것이다. 극적인 상황에서 얼마나 스스로를 가치있게 판단하고 존엄하게 자기를 유지해낼 수 있는 가가, 곧 생존의 조건이고 사람의 역량이란 말 

Jun 24, 2013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 김동조

사람은 인센티브에 대해서 아주 정교하고 미묘한 반응을 보이며, 대개 그 반응은 사전에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조금만 잘못된 인센티브 구조가 만들어져도 사회적 효율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애초의 의도까지 왜곡된다.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인센티브 구조도 잘못 디자인되면 없는 것만 못하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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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는 스스로 인터넷 음원 판매를 하게 되면 그것이 저희의 음반 산업을 카니발라이즈(cannibalize)할 것을 우려했다. 엘지도 저희가 스마트폰 사업에 뛰어들면, 자칫 기존의 휴대전화 모델을 카니발라이즈할지 모른다고 걱정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와 삼성은 스스로 카니발라이즈 하지 않으면, 다른 누가 대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엘지와 소니는 틀렸고, 애플과 삼성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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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판타지를 즐기는 기쁨은 잠깐이고, 사람은 다시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승민에게는 젊고 아름다우며 뉴욕에서 좀 더 넓은 아파트를 구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족을 둔 약혼녀가 있다. 비록 15년 만에 확인한 사랑이 아름답고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약혼녀를 버리고 이혼녀가 되어 나타난 15년 전 첫사랑에게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승민은 이미 15년전에도 자신을 찾아온 서연을 외면한 바 있고, 남편을 잃고 혼자 아들을 키운 엄마를 놔두고 뉴욕으로 떠나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 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존재이고, 대개의 인간은 삶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들을 살펴보면 비교적 일관된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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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여간 간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다. 취향에도 맞았고, 내용도 좋았지만, 몇권 씩 사서 친구들과 좋은 분들한테 선물하여 주고 싶은 책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Apr 28, 2013

다음 뉴스 댓글

http://media.daum.net/netizen/mycomment/?cPageIndex=3&rMode=otherMy&allComment=T&userId=FrxunhuhUag0&daumName=%EC%B5%9C%EC%B4%88%EC%9D%98%EB%8B%A8%EB%B0%B1%EC%A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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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사용자 댓글. 읽자말자 왈칵 울었다. 이렇게 운건 오랜만이다. 정말 많이 울었다.

Apr 22, 2013

이동진의 영화산책 '선라이즈'




정은임의 영화음악에서 정성일이 쫓기듯이 무르나우의 선라이즈가 왜 그토록 위대한 영화인가를 말하는걸 들은이후로, 선라이즈는 한번 쯤 보고 싶지만 좀처럼 봐지질 않는 영화였다. 1920년대에 나온 무성 흑백영화를 컴퓨터로 보는건 힘든 일 아닌가. 헌데 그 선라이즈를, '이동진'이 영화를 다보고나서 한시간넘게 해설까지 해준다니, 이건 노가 난거다. 정말 계탄일이다. 저어 옛날 영화를 커다란 스크린으로 볼수 있다는건 부산시민으로 태어나 롯데자이언츠와 희노애락을 같이하는 것 만큼이나 축복.

큐브릭이나 타르코프스키같은, 영화의 공기한줌까지 제어해야만 발뻗고 잘 것같은 므루나우가 절대적으로 제어한 1920년대 버라이어티 무성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것. 3D나 IMAX를 잊고, 뾰족한 테크널러지를 잊고, 움직이는 사진으로의 영화, 순수한 몽타쥬. 이건 마치 조미료와 양념으로 범벅된 음식만 먹어오다가, 정말로 괜찮은 식당에서, 친절한 요리평론가와 같이 산나물 정식을 먹은 기분이다. 아티스트같은 짭퉁 흉내내기 영화를 보는거랑은 차원이 다르다. 현대식으로 정비된 영화관에서 영화가 곧 신화였던, 소유되지 않았던 시절의 탄성과 경이, 순수한 놀라움과 엑스터시를 상상하며 공유하는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정돈 해볼만한 경험이다. 정말 좋았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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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나는 그러니까 일출이라는 뜻이 될 것이구요, 또 한 편은 뱀파이어의 이야기 노스페라투입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라는 감독은 두 편 모두 그 장편 영화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 본다면 60분 쪼끔 넘어가는 영화인데, 그러나 무르나우는 이 영화 속에서 영화의 가장 순수한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줍니다. 무성 영화 시절의 최고의 꿈이라는 것은 영화 속에서 자막을 전혀 쓰지 않고 카메라의 움직임과 인물들의 움직임, 화면 배치만으로 보여주는 영화를 찍어내는 것이 모든 영화감독의 꿈이었습니다. 이 꿈은 에이젠슈타인도 이루지 못했고 채플린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르나우가 해낸 것입니다. 이 무르나우의 무성 영화는 영화의 모든 요소를 동원해서 소리 없는 이미지의 세계, 카메라의 흔들림과 그 섬세한 몽따쥬 공간만으로 말 그대로, 이것은 정말 과장이 아닙니다, 하나의 우주, 하나의 질서 그러니까 영화가 아니라면 그 어떤 다른 것도 될 수 없는 '절대 영화'의 세계를 마련해 냈습니다. 그래서 그 무르나우는 일출에서, 노스페라투에서 카메라가 영혼을 담을 수 있으며,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최근의 영화들은 테크놀로지가 정말 많이 발달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테크놀로지로도 담을 수 없는, 그러니까 영화 중에는 정신으로 만드는 영화가 있다는 것을 무르나우는 보여줍니다. 무르나우는 카메라에 영혼을 부여한 시네아티스트로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성일 in 정은임의 영화음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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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한 날에 부산에 봄비가 내렸다. 작년, 시간에 쫓겨 무리하게 일찍 개장한 탓에 물이새던 건물을 누수점검하다 직원한명이 떨어져 추락사 했다. 그 뉴스를 본 뒤로 비가올때 기네스에 등재되어 있다고 자랑스럽게 간판까지 걸어놓은 영화의전당 외팔보 지붕밑에 흐르는 비를 보면 마음이 이상해진다. 원래부터 개장과 동시에 물이 샌다고 엄청나게 욕을 먹은 건물이다. 하지만 이제 떨어지는 빗물을 보면 꼭 사람의 진액이 같이 섞여들어가 있는 거 같지않은가.



Apr 20, 2013


동주야
난 결코 널 형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니

Apr 19, 2013

브랜치 리키

그를 아는 사람은 "야구에 미치지만 않았으면, 작가나 대통령 같은 더 위대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라고 아쉬워 했다고 한다. 하지만 리키가 야구계를 선택한 것은 전 세계 야구의 엄청난 축복이었다. 리키가 없었다면? 물론 언젠가 스프링캠프는 도입되었을 것이고, 팜 시스템도 만들어졌을 것이고, 흑인 선수들도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굉장히 늦춰졌을 것이고 발전은 지체되었을 것이다. 혁신가가 위대한 이유는 남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남들이 다 아는 것을 먼저 해결했기 때문이다. 리키는 바로 위대한 혁신가였다.


Apr 16, 2013

차별의 특징


사람들을 개인으로 취급하지 못하고
그들을 그들이 지닌 장점을 토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대신 그들의 집단, 소속을 고려해서 그들에게 불이익을 주며
그들을 그들의 소속집단에 근거하여 도덕적으로 열등하다고 간주한다

Apr 15, 2013

영이 - 김사과

아빠가 술을 마시면 엄마는 욕을 하고 아빠는 엄마를 때리고 둘은 싸운다. 한 문장으로 쓰면 될 것을 나는 왜 이렇게 많은 문장을 쓰고 있나. 왜냐하면 백 문장에는 백 문장의 진실이 있고 한 문장에는 한 문장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다른 것처럼, 열시간의 고통과 십 분의 고통이 다른 것처럼, 백 문장의 진실과 한 문장의 진실은 다르다. 이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광경이기 때문에, 한 문장-삼 초간의 고통이 아니라 천 문장-삼천 초의 고통을 안겨줘야 한다. 그래야만 당신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읽는 과정을 원하지 않는다.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

Apr 11, 2013

위험한 家系



1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을 등을 기댄 채 큰 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거구. 풍병(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 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매셨다.

2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 줌 집어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 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 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 가에 꽃 모종을 하자, 무슨 꽃을 보고 싶으냐. 꽃들은 금방 죽어요 아버지. 너도 올 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3
방죽에서 나는 한참 기다렸다. 가을 밤의 어둠 속에서 큰 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 수당까지 받았어. 초록색 츄리닝 윗도리를 하나 사고 싶은데. 요새 친구들이 많이 입고 출근해.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소리를 냈다. 츄리닝이 문제겠니. 내년 봄엔 너도 야간고등학교라도 가야한다. 어머니. 콩나물에 물은 주셨어요? 콩나물보다 너희들이나 빨리 자라야지. 엎드려서 공부하다가 코를 풀면 언제나 검뎅이가 묻어나왔다. 심지를 좀 잘라내. 타버린 심지는 그을음만 나니까. 작은누이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전에도 아무것도 해논 일이없구. 어머니가 누이의 뺨을 쳤다. 약값을 줄일 순 없다. 누이가 깍던 감자가 툭 떨어졌다.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너희들을 건졌어. 이웃 농장에 가서 닭도 키우셨다. 땅도 한 뙈기 장만하셨댔었다. 작은 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채소씨앗 대신 알약을 뿌리고 계셨던 거에요.

4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보면 무엇하겠느냐, 묵은 밭에서 작년에 캐다 만 감자 몇 알 줍는 격이지. 그것도 대개는 썩어 있단다. 아버지는 삽질을 멈추고 채마밭 속에 발목을 묻은 채 짧은 담배를 태우셨다. 올해는 무얼 심으시겠지요? 뿌리가 질기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심을 작정이다. 하늘에는 벌써 티밥 같은 별들이 떴다. 어머니가 그만 씻으시래요. 다음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 아버지는 흙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리시려고.

5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선 석유냄새가 났다. 글쎄,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6
그 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하시고 굳은 혀. 어느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반듯한 불바라기 씨앗 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서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동지(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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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삶에는 거친 언어가 필요하고, 그것이 바로 시다.'

Apr 5, 2013

달리기와 수련, 하루키





"...달리고 있으면 그저 즐거웠다. 달리는 것은, 내가 이제까지의 인생을 사는 가운데 후천적으로 익혔던 몇가지 습관 중에서 가장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유익한 운동인 동시에 유효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나는 매일매일 달리면서 또는 마라톤 경기를 거듭하면서 목표달성의 기준치를 조금씩 높여가며 그것을 달성하는 데에 따라 나 자신의 향상을 도모해 나갔다. 적어도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두고,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매일매일 노력해왔다. 나는 물론 대단한 마라톤 주자는 아니다.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하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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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거리달리기에 취미를 붙인지는 반년이 채 안되었고, 이제 겨우 10킬로미터 완주를 하고 하프코스에 도전하는 중이지만 하루키의 책을 읽다보면 공감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오늘은 정말 달리기 싫은 날인데 그냥 이쯤에서 접을까"라는 생각이나, "한시간, 두시간을 넘어 달릴 때 과연 대체 남들은 무엇을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은 꽤 했었거든요. 에세이집 앞부분에 있었던 저 구절을 보곤 척추아래쪽이 쩌릿쩌릿했습니다. 의식하진 않았지만, 운동을 싫어하는 내가 다른 스포츠보다 더욱 달리기에 애정을 둘수 있었던건 바로 자기 자신을 적(敵)으로 둔 달리기의 "향상"성 때문이었거든요. 5분을 채 못뛰고 지방덩어리를 벽돌처럼 온몸에 메달고 헐떡거리는 나를 이기고, 10분을 뛰고 땀이 범벅된 나를 이기고, 30분에서 포기하는 나를 이기고, 한 시간을 뛰고 무릎은 나무막대처럼 후들거리는 나까지 이기는, 이토록 명료한 수직성.

 달리면 달릴수록 땅위에서 겸손해질수 밖에 없습니다. 이건 제가 인성이 고매하거나,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라, 땅을 밀고 박차 아주 잠깐이지만 공중에서 체류했다가 다시 지상으로 끌려오고만 마는 행위의 연속에서 저절로 머리를 조아리게 되는 겁니다. 처음 시작은 당당합니다. 육식동물처럼, 허리는 펴고 가슴은 쫙 펼치며, 시선은 또릿한 눈으로 전방에서 약간 더 위를 응시합니다, 잘빠진 자동차 내연기관처럼 장기는 움직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점을 돌파하면 척추는 수그라들고 시선은 점점 아래를 향합니다. 위엄있던 두 팔의 흔들림은 티렉스의 두팔처럼 겨우 상체에 붙어서 흐느적거리면서 터덜터덜걷습니다. 순례자입니다. 과거의 나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온몸을 쥐어짜내며, 머리를 조아리면서 도로에 자기를 투지해야합니다. 그래야지 과거의 나를 이기고, 좀 더 많은 땅을 밟을 수 있으니까요. 자신감과 근육의 율동에 맞춰 부풀어올랐던 응큼한 상상(달리면서 야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저만은 아닐겁니다)과 온갖 잡생각은 사그라들고, 그 공백을 생각의 부재가 메꿉니다. 헐떡거리면서 드리는 과거의 나에게 바치는 위로와, 현재의 나에게 가하는 격려이자 채찍.

달리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결국 대게는 보통 장거리 레이스는 정말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자기 자신과의 대결입니다. 건방졌던, 그런데도 열등감에 휩싸였던, 성격 더러웠던 나를, 살찌고 인상이 좋지 않았던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자기 자신을 긍휼히 여기게 할 수 있는 습관. 달리고, 헤엄치고, 밟고, 올라가면서 땀으로 체득하는 경험칙의 자기 반성입니다. 머리를 조아리고 땀으로 허옇게 번들거리는 몸통을 다시 땅위에서 떼어내는 수련. 사람이 철이 들고 나아진다는건, 허벅지 근육과도 조금은 연관이 있을거 같기도 합니다.




가장 기쁜 사랑시는 즐거운 편지, 가장 슬픈 사랑시는 가재미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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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 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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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는 읽을수록 비단 사랑을 떠나서, 살면서 무언가를 열망할때의 기다림과 그 자세에 대한 낭만적인 위로같아져 더 즐겨읽게 된다.

 문태준의 가재미를 읽다보면 파랑같은 날들에서 헤진 감정이 국수를 삶던 저녁에서 완전히 무장해제 되고만다. 아, 국수를 삶던 저녁이라니 - 그리고 다다른 그녀의 침대에서, 결국 생물학적 죽음을 조우해야하는 인간 본연의 숙명앞에 무력해지는 우리를 마주하게 되지않는가, 그래 우린 본연적으로 슬프게 태어났다.

Feb 25, 2013


 이 낯설고 아름다운 희곡이 그 시절을, 또 한 번 실패한 가족의 문제를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첫번째는 내 잘못이 아니었지만, 입양된 아이들은 언제나 스스로를 탓하는 법이다. 그리고 두번째 것은 명백히 내 잘못이었다.
나는 섹스와 성정체성으로 인해 혼란스러웠고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무엇을 먹을지, 그리고 A 성적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실질적인 문제들로 괴로웠다.
도와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는데, 바로 T.S.엘리엇이 나를 도왔다.
그래서 나는 시를 사치품이나 선택의 문제, 혹은 교육받은 중산층의 전유물이라고 하거나, 시는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학교에서 읽게 할 필요가 없다는 등 사람들이 시와 우리 삶에서의 시의 위치에 관해 이상하고도 어리석은 소리를 할 때마다, 그들은 아주 수월한 삶을 살아온게 아닌가 생각한다. 거친 삶에는 거친 언어가 필요하고, 그것이 바로 시다. 그것이 바로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삶이란 어떠한가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언어.
 그것은 감추는 장소가 아니라, 바로 발견하는 장소이다.

겨울에는 누구나가 갇혀있지만 봄에는 갇혀있을 수 밖에 없는 사람만이 갇혀있는다




 날씨가 풀린 늦겨울 월요일 저녁은 직장인이 아닌 사람에겐 처치곤란이다. 조금은 심심하고 무언가를 해야할 거 같기도하고, 월요일이라 그렇게 마음속 흥이 나지도 않는다. 마뜩히 연락할 상대도 없고, 친구를 불러내서 술한잔 하자고 말하기도 '좀'그런 월요일저녁. 날씨는 풀려서 푸근하고, 계절바뀌어 봄되어서 호르몬때문인지 마음은 들쭉날쭉해지는 날의 저녁은 엉덩이는 움찔움찔거리지만 발걸음은 안떨어지는 부조화의 날이다. 집에서 혼자 마트에서 사온 와인을 따는 것도 안내키고, 보고싶었던 TV쇼를 다시보는 건 더욱 싫은 늦겨울날에는 달리기, 달리기를 해야한다.  

 짧은 운동용 숏팬츠와 바람막이를 걸치고 나와 뛰다보면 곧 후회가 든다. 저녁날 퇴근하는 사람들과 운동하는 이로 붐비는 조깅로에 허연 다리를 내놓고 뛰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추운 바람에 손과 얼굴은 뻣뻣하게 굳고 추위로 굳은 몸때문에 호흡은 점점 개판이 되간다. 이어폰에서 나오는 클래식FM 라디오는 바람때문에 잘 들리지도 않는다. 아직 뛰기에는 추운 시기상조의 밤.

 목표거리를 절반정도만 겨우 채우고 어그적거리며 집으로 뛰어갈동안, 해지고 차분히 깔린 저녁날 시큼한 밤공기에서 '그래도' 계절이 바뀐 걸 안다. 추위에 벌겋게 데인 허벅지와 손은 몇주전처럼 처참하게 시리진 않고, 거친 호흡으로 목구멍안으로 들어가는 밤공기도 완전히 냉수같지 않은 밤. 짧지만 사람을 베베꼬게 만드는 계절이 돌아왔다. 김훈 표현을 빌려서 사쿠라꽃 피고 관능감에 쩔쩔맬 계절. 입춘은 이미 지났고, 학교는 개학하며, 취임식도 끝났다. 변한 것들과 변하지 않은 틈에서 계절은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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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 픠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뜨고.
초록제비 무처오는 하늬바람우에
혼령있는 하눌이어,
피가 잘 도라....
아무病도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



Feb 15, 2013

수영과 달리기. 생각의 평화




수영은 정말로 사유적이며 정적인 운동이다. 바둑이나 체스같은 두뇌활동은 일어나지 않지만, 헤엄치는게 몸에 익고 물결을 탄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시점부터 수영은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신체활동을 벗어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의 공간을 여는 운동이 된다. 풀장 벽을 발로 민후 잠영에서 부상, 크롤, 다시 턴. 매번 수영장을 갈때마다, 첫 잠영이후 올라와 물길을 잡아끌어내려 손을 어깨앞으로 펼치는 순간을 사랑한다. 수영은 부조화의 운동이다. 수면 위의, 풀장의 소음과 물 아래의 고요의 간극. 헤엄을 치는순간 심장은 바쁘게 뛰면서 피를 계속 펌프질하고, 온몸의 근육은 쥐어짜냈다가 다시 펼쳐지며 정신없이 움직인다. 호흡을 하고 다시 얼굴을 물에 집어넣는 순간, 내장은 움찔거리며 뱃속에서 출렁거린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하물며 헤엄치면서 말을 할 수도 없다. 육체는 헐떡거리지만 머릿속 영점이 잡힙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과 공간이 열린다. 하룻동안의 일들, 며칠사이의 일들, 가족과 싸웟던 일, 친구들과 지인들한테 잘못한 행동, 앞으로의 계획, 기억, 상상까지. 죽여준다, 정말로 죽이는 운동이다.

 공익근무시절, 저녁에 출근하여 밤샘야간조를 마치고 아침에 햇빛비치는 수영장을 찾아갈때의 락스냄새, 수영장의 소리들, 유리창에서 쏟아져 물에 반사된 햇살들은 최고였다. 밤새 추위에 떨며 오그라져 있던 몸은 물속에서 풀어헤쳐지고, 한시간 정도의 운동이후 기분좋은 아늑함은 말하기 남새스럽지만 더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수영을 처음 익히는 주변 사람들한테 25m 보단 50m 레인에서 배우는걸 추천했었다. 50m 레인에 익숙하다가 25m 레인에서 수영을 하니, 첫번째는 운동의 재미가 좀 떨어지고, 생각의 호흡도 짧아지기 때문이다.

 달리기는 어렵다. 달리면 달릴수록 리듬과 박자감이 중요한 운동. 어떤 운동이든 몰입의 순간이 있겠지만, 계속 달리다보면 다른 생각이 들질 않는다. 자아 성찰이고 나발이고 힘들어 죽을 거 같다. 몸에 쌓여서 출렁거리는 살덩이들이 원망스럽고, 무릎은 체중을 견디며 비명을 질러대며, 허벅지와 등, 팔뚝은 긴장해서 땀을 개워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득, 내가 얼마나 달렸고, 시간이 얼마이고를 떠나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않는 하얀 공백같은 때가 등장한다. 신체는 비명을 지르며 기계적으로 움직이지만, 생각이 없는 시점. 그런 순간이 길진 않다, 짧습니다. 몇십초에서 길어봤자 수어분인 그런 포인트가 시간을 내서 달리다보면 언뜻언뜻 스쳐간다. 취미로, 자기가 좋아서 달리는 것은 컴퓨터 게임에 한참 빠져있을때와 같다. 생각의 공백으로부터 오는 평화.

 한참을 달리고 나서 다리와 팔에 붙어 반짝거리는 소금기를 보면, 사람 몸이 참 신기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한다. 핥아보면 당연하겠지만 정말 짭조름하다. 달리기도 근육통이 있다. 처음으로 10km 완주한 다음날 느꼇던 근육들의 욱씬거림과 탈력감, 밤늦어 잘려고 누웠을때의 무릎이 간질거리는 느낌. 이것 또한 죽인다. 아, 김연수와 하루키가 그토록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지레짐작이지만 조금씩 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