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막염 때문에 눈을 감을 때마다 눈에서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감기까지 얹혔다. 한 시간정도 달리기를 하고 더운 땀을 빼니 갑자기 미식거리며 식은 땀이 비질비질 세어나왔다. 택시를 타고 영화의 전당에 도착했다. 처음 앉아본 야외 극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이 훨씬 많았다. 가족들과 연인들끼리 온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괜찮은 자리를 발견한건 행운이었는데, 음식을 들고온 관객들이 많았다. 감기몸살로 솎아낸 빈속을 족발과 치킨과 햄버거와 김밥냄새가 뒤집기 시작했다. 같이 달려온 무우냄새가 결정타였다. 속이 울렁거렸다. 들고온 커피가 아니였다면 화장실로 달려가서 토해버렸을 것이다. '아.. 괜히 왔구나', 영화가 시작했다.
금성무가 헐레거리며 뛰어다니고, 임청하와 어깨를 부딪히고, 다시 things in life가 나오는 술집에서 트렌치코트를 입고 가발을 쓰고 선글라스까지 낀 임청하가 담배를 핀다. 뒤집힌 속과 통닭냄새가 신경쓰이지 않았다. 페이와 양조위가 식당에서 마주치는 순간, 이 영화를 보러오지 않았다면 다시 몇 년을 후회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California Dreamin이 나올 때, 갑자기 울컥거리면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양가위한테 무장해제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이 사람은 영화를 이렇게 간드러지게 만들까.
97년 반환을 앞둔 홍콩의 세기말적 정서가, 곧 왕가위 영화의 근본이었다. 정서적 과잉과 눈이 뽀개질 정도의 아름다움, 현실에서 한 걸음 살짝 비켜선 인물들의 대사는 전부 종말을 선고받은 이의 공허의 감성에서 출발한다. '화양연화'와 '중경상림'이 그랬고 '아비정전'과 '동사서독'이 그랬듯이, 왕가위는 운명론적 허무주의에서 발버둥치는 사랑과 인간의 군상들의 동어반복을 이야기했다. 그게 왕가위의 한계이고, 동시에 가장 보는 이의 흉부를 먹먹하게 만드는 점이었다. 홍콩은 반환된지 십수년이 넘었고, 58년 개띠인 왕가위는 초로의 입구에 서있다. 그래도 아직 그의 영화는 여기저기서 틀어지고 있고, 장면들마다 피어나는 거리와 연인의 풍경에서 솟아나는 울림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건 세월에 관계없이 결국 세상에 쓸려간 사람들의 생애는 비슷한 단면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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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경삼림은 다시 볼 수록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만일 당신이 새로운 21세기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당신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중경삼림은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영화입니다. 혹은 질문하는 영화입니다. 제 생각에 중경삼림은 1990년대에 만들어진 최고의 연애영화입니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 혹은 곧 사랑하게 될 사람들, 또는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막 헤어진 사람들이 마치 치료하듯이 보아야할 영화라고까지 말하고 싶습니다. 혹은 우리 시대의 사랑하는 방식에 관해서 말하는 영화, 그러니까 중경삼림은 훗날 20세기의 마지막 10년동안 이 20세기의 마지막 연애방식에 관해서 말하는 영화라고 기억될 것입니다. 중경삼림은 한 마디로 사랑에 관한 영화입니다. 이제 막 시작될 사랑, 막 떠나간 사랑, 하여튼 그 사이에 있는 시간에 관한 영화입니다. 감사합니다. - 중경상림 DVD 정성일 코멘터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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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많은 장면들이 좋지만, 저에게 중경상림에서 가장 압권은 양조위가 가게에서 지나간 애인의 편지를 읽지않고 블랙커피를 마시는 장면입니다. 카운터에 기댄체 아무말도 하지 않는 페이, 커피를 마시는 양조위, 지나가는 사람들, 이 짧은 순간의 침묵에서 흘러나온 사랑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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