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5, 2012
김훈, 낙원의 치욕
정원(庭園)은 인공의 낙원이다. 꿈속의 낙원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낙원은 인공의 낙원이다. 도가의 무릉도원이나 한산습득의 천태산이나 혹은 마르크스의 국가소멸단계가 그러므로 모두 인간의 낙원인 것이다. 인간은 욕망을 사회경제적으로 정당화하고 정당화된 욕망을 제도화 함으로써 낙원을 지향할 수도 있지만, 욕망의 뿌리를 제거함으로써 낙원을 지향할 수도 있다. 욕망을 제거하려는 길과 욕망을 완성하려는 길이 마음속에서 엇갈리면서 사람들의 꿈은 엎어지고 뒤벼지며, 사람들의 말은 끝없는 동어반복으로 중언부언을 거듭하고 있다.
낙원에도 낙원의 양식(樣式)은 존재한다. 자유를 지향하는 길목에서, 고작, 그것도 천신만고 끝에, 양식 따위가 발생하고 있는 이 인간세(人間世)의 풍경이 희극인지 비극인지, 축복인지 저주인지 나는 분간하지 못하지만, 그것은 필시 저주에 가까운 안쓰러운 업장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낙원의 양식은 낙원의 자유를 다시 속박하지만, 이 속박은 그래도 견딜만한 속박이다. (중략) 그 때, 양식의 가파름과 느슨함은 모두 인간으로부터 멀어지고, 우리는 양식과 더불어 서늘함을 느끼는데, 이 자유의 서늘함이 곧 실락원의 슬픔이다. 여름의 소쇄원에서 실락원의 슬픔은 수목과 더불어 무성하였다.
소쇄원을 꾸민 사람은 조선 중종 때의 처사 양산보이다. 양씨 문중의 기록에 따르면, 양산보는 17세의 나이로 당시 대사헌인 조광조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한다. 그 무렵의 조광조는 삼십대의 청년으로, 이념화된 주자학의 가파른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조광조의 낙원은 말과 사유의 낙원이다. 조광조는 명증한 언어로 표현되는 사유의 힘에 의해 현실을 재편했다. 그는 반정의 공로에 빝붙은 원로대신들을 '소인배'라는 극언으로 매도하면서 기득권을 박탈했고 소격서를 철폐함으로써 이성의 위엄을 과시했다. 말과 사유와 권력과 현실이, 조광조에게는 동일한 것이었고, 조광조의 낙원은 그 네 개의 범주들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맞아 떨어져야만 비로소 가동되는 근본주의자의 낙원이었다. 이념화된 주자학은 인간의 심성 속에서 고개를 쳐드는 욕망의 싹을 애초에 봉쇄시켜버리는 사유의 장치를 확보하고 있었고, 그는 성현의 도와 제왕의 법으로 인륝벅 가치의 절대성을 현실역사 속에서 구현하는, 한 절대인간으로 홀로 서있었다. 조광조에게 왕이란 단지 사직의 계승자가 아니라, 세계의 이성적 존재양식의 최정상에 위치하는 가치의 화신으로, 인성과 현실을 그 안에서 종합하는 절대이성이었다. 벌레먹은 '주초위왕'의 나뭇잎이 아니더라도 이 젊은 근본주의자는 이미 스스로 이성의 제왕이었다.
조광조의 낙원은 훈구파 원로권귀들의 욕망의 연대에 의해 붕괴되었고, 그는 전남 능주의 유배지에서, 원로권귀들이 왕을 경유해서 내려보낸 사약에 처형되었다. 향년 37세.
젊은 조광조가 어린 양산보에게 베푼 교학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던가는 양씨네 문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어린 양산보는 조광조의 도포자락에서 휘날리는 이성과 사유의 강파른 위엄에 압도되어 있었을 것이고, 사유의 힘으로 세계의 질서를 재편해나가는 젊은 스승의 아름다운 권력과 그 권력이 현실 속에서 가동되는 일대 장관을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젊은 스승의 낙원이 붕괴되자 양산보는 지체없이 낙향하였다. 양산보는 한 작은 강산의 서늘하고 깨끗한 물가에 자신의 낙원을 차렸다. 그는 다시는 대처의 땅을 밟지 않았고 세상잡사를 글에 담지 않았다. 그는 다만 돌과 나무와 물줄기를 끌어모아 소쇄원을 꾸몄다. 소쇄원에서는, 세계를 혹은 풍경을 관찰하고 해석하고 거기에 관하여 말을 하는 주체로서의 자아의 입지와 위상이 물리적 공간의 거죽으로 돌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쇄원에서는 어떤 풍경이나 정자나 나무도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위치나 시선의 각도로부터 자유롭다. (중략)
낙원은 자유의 패러디이다. 헐거운 양식, 감추어진 양식은 낙원이 패러디라는 운명 자체를 감추려한다. 감추어지는 운명이란 없다. 양산보는 젊은 스승 조광조로부터 얼마나 멀리 흘러왔는가. 양산보는 그렇게 흘러서 조광조와 매우 가까운 곳에 소쇄원을 차린 셈이다. 저녁 어스름 속의 소쇄원에서 나는 사약 한 사발에 피를 토하고 죽은 조광조의 혼백이 풀 먹인 도포자락 휘날리며 무어라고 쉴새없이 중얼거려대면서 제월당 뒤쪽 숲을 거니는 환영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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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하고 반년전 쯤에 전남으로 여행을 갔을때, 눈오는 날 담양의 하늘은 흐려서 불쾌했고, 사람없는 관광지엔 팥죽과 오뎅을 파는 상인들 몇만 정원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눈내리는 소쇄원엔 초록이 없고, 팥죽파는 스태인리스 통에서 나오는 연기가 뿌옇다. 정자엔 눈만 쌓였다.
조광조는 조선 성리학의 이념적 정점이었다. 그는 '가장 완강하고 가장 순결한 복고주의의 힘으로 가장 미래지향적인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소학의 원칙주의를 체질화한 그는 이념과 현실의 차이를 긍정할 수 없었다. 조광조의 비극은 그 간극의 불인지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어려서 총명하였고, 젊어서 등고登高 하였다. 조선조 엘리트의 요람 성균관에서 독보적인 총아였으며, 중종 10년 문과에 급제한뒤, 중종 13년 정2품 사헌부 대사헌에 올라, 중종 14년에 유배지에서 임금이 내린 사약을 받아 경복궁으로 절한 뒤 죽었다. 그 뒤 조광조는 국운이 바스라질 조선조의 황혼 무렵까지 사림들로부터 성역화 되었다.
눈내리는 을씨년스런 관광지 앞에서 퍼먹는 팥죽의 당도는 무분별하게 달아 추운날 혈당을 올리고 턱 안쪽 침샘을 흥건하게한다. 달기만한 팥죽을 먹어가며 난 '간극'의 불인지에 대하여 생각했지만, 아직도 소쇄원하면 먼저 생각나는건 눈 내리는 겨울날 먹던 달디달던 팥죽과 엄청나게 짜웠던 오뎅국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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