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23, 2012

노비컴플렉스, 정도전, 정몽주 - 정도전을 위한 변명

[태조실록]의 '정도전 졸기'에 의하면 정운경의 장모, 즉 정도전의 외할머니는 승려 김진과 여자 노비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승려 김진은 고려의 명문가인 단양 우씨 우현보 집안의 인척이었는데 자기 종인 수이와 아내와 간통해서 딸을 낳고 승려를 그만둔 후, 수이를 쫓아내고 그 아내를 데리고 살았다고 한다. 김진은 딸을 특별히 사랑하여 명문가인 연안 차씨 집안의 인척인 성지 우연의 첩으로 시집보내고 노비와 토지와 집을 모두 우연에게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후에 김진의 딸과 우연 사이에서 난 딸이 바로 정운경의처가 돠었다.

 봉건시대이 양반이 여자 노비를 건드리는 것은 흔할일이었다. 또 승려가 여자를 건드리는 일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승려가 파계까지 해가면서 그 여종을 안방에 들여놓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아마도 김진이라는 승려는 그 여자 노비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듯하다. 그러나 김진은 증손자인 정도전이 후에 자기 가문과 원수가 되어 피를 부르는 살육극을 연출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진이 속했던 우현보 가문은 고려말 구세력의 대표였고, 우현보의 손자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의 사위였다. 우현보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디, 이들은 정도전이 처음 벼슬길이 나설 때부터 자기 집안 종의 자손이라고 업신여겄으며, 대간 벼슬에 있으면서 정도전이 벼슬을 옮길 때마다 정도전의 고신(관직임명사령장)에 성명을 해주지 않아 그를 괴롭혔다고 실록에 기록돼 있다. 봉건시대의 개혁정치가에게 핏줄시비는 오늘날의 개혁정치자에게 색깔시비만큼이나 떨쳐버리고 싶은 약한 고리였을 것이다. 정도전은 당시의 원한이 뼈에 사무첬던 듯, 조선 건국 후 우현보와 아들 3형제, 그리고 맞손자를 귀양보낸 후, 3형제에게 곤장형을 가해 몰살해버렸다. 피의 복수였던 셈이다.

 이와 관련하여 '태조실록'의 "정도전 졸기"는 정도전에 대해 "옛날에 품었던 감정은 기어코 보복하려 하였다"는 평을 남기고 있다. 우씨 형제 장살사건은 정도전의 정치인생에 가장 큰 오점으로 기록된 것이다.

 -

  그러나 이 피비리낸 나는 살육극의 책임을 정도전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고려말에는 역성혁명세력과 구세력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을 물고뜯는 치사한 인신공격이 횡행하였다.

 한때 정도전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으며 당대 선비들 사이에서 '도덕의 으뜸'으로 칭송받던 정몽주조차 대간들을 움직여 그를 탄핵하면서 "천한 혈통을 감추기 위해 본주인을 제거하려고 모함했다"는 것을 죄상으로 들었으니 정도전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본주인'이란 표현은 정도전을 우현보 집안의 노비쯤으로 본 것이요, 정도전의 개혁운동을 천민의 피를 감추기 위한 '핏줄 콤플렉스' 정도 로 깎아내린 것이다.

 -

  흥미로운건 고려왕조 최후의 보루이자 도덕성을 무기로 하였던 정몽주또한 정권말기 파워게임에서 극단적인 정치 공세를 했다는 점이다. 중원의 패자가 바뀌고 반도의 궁궐 안팎에선 살인의 나선이 끝이질 않던 역사의 장면에서 드러나는 야만성은 보편적 역사에 대하여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준다.

 정도전의 정치사상이나 비전과는 다르게 이런 개인적인 감정에서 발아한 사사로운 보복이나 불필요하게 과격한 정적제거는 여말선초에서 부분부분 등장한다. 그의 혁명성과 현실감각이 양립할 수 있었기에 역성의 왕조수립이 가능하였다지만, 개인적인(이라고 추정되는) 사보타지와 보복은 그가 겪은 삶과 수반해야했던 열등감과 분노를 지극히 범인스럽게 표출하는 방식이였는지, 혹은 고도의 정치적 술수였는지는 모를일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