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18, 2012

김현,황동규,반포치킨



대설(大雪)날 -故 김현에게
                                             황동규 
겨울하고도 흐린 날 
눈도 제대로 내리지 않고 
눈송이 몇 공중에 날려놓고 바람만 불다 말다 하는 날 
이 식은 지구 껍질에 미열(微熱)이나마 심을 것은 
그래도 버섯구름이 아니라 
알맞게 거냉(去冷)한 술 한 잔이라면 
오늘 양평 네 잠들어 있는 곳에 가 
찬 소주 대신 
가슴에 품고 온 인간 체온의 청주 한 잔 땅에 붓노니 
그 땅이 네 무덤이건 
우리 자주 들른 '반포 치킨'이건 
그냥 지나쳐버린 어슬어슬 산천이건 

작정한 듯 검푸른 하늘 
바람이 눈송이 하나 무덤 위에 띄워놓고 
술 방금 받는 부운 위(胃)처럼 한번 부르르 몸을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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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묻던날 
(부제:기억나지, 그날? 이성복에게)

                                                     황동규


김현 묻고 돌아올 때, 그 장마 구름 잠시 꺼진 날, 
우리는 과속을 했어, 60킬로 도로에서 100으로.
우리는 재빨리 도망치고 있었던 거야 추억에서.
단속하던 의경 기억나지?
의경치고도 너무 어려
우리의 복잡한 얼굴을 읽을 줄 몰랐어.
마침내 죽음의 면허를 따 영정이 되어
혼자 천천히 웃고 있는
웃고 있는 김현의 얼굴이 속절없이 아름다웠고
그 얼굴 너무 선명해서 우리는 과속을 했어.
경기도 양평의 산들이 패션 쇼를 하려다 말았고,
딱지를 뗐고,
그 딱지 뗀 힘으로
우리는 한 죽음을 벗어났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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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들이 다 글쓰고 싶다는 내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글들은 아주 평판이 높아 그것을 읽고 싶다는 욕망을 자극하지만 마음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게 하고, 어떤 글들은 첫 줄부터 마음을 사로잡아 되풀이 그것을 읽게 만들고, 나아가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게 한다. 문학비평가로서 가장 즐거운 때는 그런 글을 만날 때이다. 내 마음속의 무엇이 움직여 그 글로 내 마음을 무의식적으로 이끌리게 하는 것일까?  그것을 생각하다보면 때로 내 마음을 움직인 글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내 마음이 움직인 흔적들만 남아, 마치 달팽이가 기어간 흔적처럼 반짝거린다. 그 흔적들을 계속 쫓아가면, 그것은 기이하게도 다시 내 마음을 움직인 작품으로 가 닿고, 그 길은 다시 그것을 쓴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으로 다가간다. 내 마음의 움직임과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은 한 시인이 '수정의 메아리'라고 부른 수면의 파문처럼 겹쳐 떨린다. 나는 최근에 그런 떨림을 느끼게 한 한 편의 시를 읽었다. 그 시는 김지하의 '무화과'(<우리 시대의 문학>5집)라는 시이다." - 김현의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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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황지우가 목울대로 넘어오는 울음을 꾹 참으며 '1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평론가'라고 추모했던 김현은 1942년 7월 29일 전남 진도군 진도읍 남동에서 태어나 1990년의 오늘, 6월 27일에 타계했다. 스무 살 되던 1962년에 <자유문학> 신인 공모로 비평가가 된 이후 '4월 혁명과 한글 세대'라는 바탕에서 30년 가까이 정열적으로 글을 읽고 또 썼다. 

앞서 1966년에 단편소설도 발표했지만, 이미 스물두 살 때인 1964년에 6편의 글을 묶어 첫 번째 평론집 <존재와 언어>를 5백부 한정판으로 발간했을 정도로 그는 연습생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리그에 뛰어든 '프로'였다. 그가 김화영, 이청준, 김치수, 김승옥, 곽광수, 김병익, 김주연,  황동규, 정현종, 박상륭 등과 이룬 7, 80년대의 문학적 풍경은 깊고 풍성한 숲이었다. 그 아래로 이인성, 황지우, 이성복, 정과리 등의 나무가 쑥쑥 자랐다.  

김현은 술을 많이 마셨다. 그는 반포상가 옆 반포치킨에서 부었고, 후배들의 골방에서 부었고, 술집에서 부었고, 땅에서 부어냈다. 간경화로 죽었을 때 나이는 48세였다. 음주량과 무지막지한 흡연량과 생활 습관을 감안하였을 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그래도 아깝다. 아까운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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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또한 그가 고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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