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는 암컷보다 강했다. 캄캄한 밤, 사냥을 마치고 돌아가던 어미는 타이가 깊은 곳에서 메아리치는 수컷들의 음성에 자주 귀를 기울였다. 그럴 때면 심장의 박동이 멈추고 강한 전율이 강인한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어미는 걸음을 멈추었다. 가슴에서 애처로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새끼 특유의 소리로 귀엽게 가르랑거리며 한 발 한 발 자신의 뒤를 따르는 어린 것들에게 눈길을 한 번 던지는 것만으로 모든 유혹을 뿌리치기에 충분했다. 어미는 깊고 낮은 한숨을 내쉬며 핏줄의 부름에 최우선으로 복종했다. 그리고 온순하게 가족의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산과 숲은 고요했고, 황량한 고장은 평화롭게 잠자고 있었다. 멀리 작은 골짜기 깊은 곳에서 올빼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먹이를 기다리는 붉은 늑대들은 근처의 고개 뒤에서 구슬프게 울어댔따. 능선에 다다른 타이가의 제왕은 튀어나온 바위 위에 멈춰 서서 숲의 온갖 소리를 들으며, 맷돼지 떼가 숨어 있을 떡갈나무 숲을 유심히 살폈다. 자신의 엄청난 힘을 알고 있는 왕은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진 슈하이의 방대한 영토를 응시했다. 남쪽에는 칠흑 같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달빛에 비쳐, 타투딩즈 산꼭대기는 마치 레이스처럼 구멍이 뚫린 듯 보였다."
"넓고 반듯한 이마에는 ‘왕(王)’이라는 글자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으며, 풍성하게 자라날 갈기가 나타나기 시작한 목덜미에는 또 다른 글자의 징후가 벌써 희미하게 보였다. 그것은 ‘위대한’이라는 뜻의 ‘대(大)’라는 글자였다."
허파 가득 얼음으로 차오르는 툰드라의 밀림에서, 날랜 육체와 보라빛 일렁이는 포효로 수해(樹海)의 모든 것들을 맹종 시켰던 위대한 왕의 생사는 문명의 역사와 함께 맞물려간다. 러시아는 하얼빈 철도로 만주에 뜨거운 철사같은 손길을 펼쳤고 일본제국은 조선반도를 넘어 북쪽으로 날뛰기 시작한다. 순결과 원시로서, 왕은 그 자체로 지엄하며 자연의 현현이었으나, 왕국의 침식을 막을 수는 없었다. 늙은 사냥꾼 퉁리는 이 강대하며 아름다운 생물체에게 외경을 표하며, 왕또한 가혹한 자연에서 수많은 아수라를 돌파한 노쇠한 인간과 공감한다. 이것은 대자연에서 태어나, 인간의 역사에 의해 가장자리로 소멸해가는 자들의 종을 뛰어넘은 동질감이자 서로에 대한 존경심일 것이다.
왕은 인간에게 죽고, 신화에서 밀려나 짐승으로 죽어간 아무르 호랑이의 오늘날 남아있는 개체수는 극도로 미약하다.
고등학교 때, 백군에 가담한 뒤 패전 후 만주국으로 망명하여 수십년을 산맥과 숲에서 보낸 러시아인의 이 자연소설에 한동안 매료되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까지 학교에 있어야 했던 대도시의 고교생에게, 백색의 수해(樹海)에서 군림하는 흉포한 야수는 순진하고 곱상한 마초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다. 지금은 중국 동북부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놀면서 서식지 자체가 완전히 소멸해 버렸고,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의 이미지 조성을 위한 정책으로 러시아에 터전이 조성되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위대한 왕은 깨어날 것이다. 그 우렁찬 목소리가 산과 숲을 가로질러 쩌렁쩌렁 울리고 끝없는 메아리가 되어 퍼져 나갈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이 그 소리에 몸을 떨고, 신성한 연꽃이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을 머금고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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