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3, 2012

무기의 땅, 악기의 바다 - 김훈

세계를 개조하려는 열망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무기의 꿈과 악기의 꿈은 다르지 않다.

4번 국도는 경주 시내에서 토함산을 가로지르며 동쪽으로 나아가 감포 바다에 닿는다. 토함산 권역을 거의 벗어나는 어일리에서 4번 국도를 버리고 우회전하면 929번 지방도로이다. 929번 지방도로는 토함산 능선을 오른쪽으로 펼쳐보이며 7킬로미터를 동남쪽으로 달려 감은사지 앞을 지나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의 바다에 닿는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그 종착점 너머의 세계와 연결된다. 길은 길이 아닌 곳과 닿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길의 지향성은 세계적이며, 모든 길의 숙명은 역사적이다. 929번 지방도로는 경주와 감포읍 대본리의 바다를 잇는다. 이 한 도막 지방도로는 바다를 향하는 7세기 신라의 인후(咽喉)이며, 인간의 꿈의 힘으로 살육의 피를 씻어내던 신라의 지성소(至聖所)이다. 인간은 아늑하고 풍성한 곳에서 다툼 없이 살고 싶다. 낯설고 적대적인 세계를 인간의 안쪽으로 귀순시켜서, 그렇게 편입된 세계를 가지런히 유지하려는 인간의 꿈은 수천 년 살육 속에서 오히려 처연하다. 세계를 개조하려는 열망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무기의 꿈과 악기의 꿈은 다르지 않다. 철제 무기의 경이로운 날카로움을 정련해가던 가야의 마지막 날들에, 우륵은 가야금을 완성한다. 그의 조국은 한 줄기 산세와 한 줄기 물길에 기대어 있던 부족 국가였다. 위태로운 조국의 마지막 순간에 우륵은 가야금을 들고 조국을 떠난다. 그는 적국인 신라의 진흥왕에게 투항했다. 그가 버린 조국의 이름은 그의 악기에 실려 후세에 전해졌고, 그의 악기는 신라 천년의 음악 바탕을 이루었다. 진흥왕의 팽창주의는 그가 남긴 순수비에 적혀 있는데, 아마도 역사 속에서, 진흥왕의 무기와 우륵의 악기는 비긴 것 같다.

7세기의 929번 지방도로에서, 전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꿈은 무기에서 악기로 이행하고 있다. '삼국사기' 속의 7세기는 '수급 5백을 베었다' '수급 1천을 베었다' '수급 3천을 베었다' 는 문장의 끝없는 연속이다. 자고 새면 베고 베이는 것이다. 수사적 장치가 전혀 없이 발가벗은 단문으로 기록되는 그 '목 베기 시대'는 철제 무기의 성능 시험장 같은 인상을 준다. 통일 전쟁의 총사령관인 김유신 자신이 철제도끼를 들고 사기(史記)에 등장한다. 고전적 단순성에 엄격한 김부식의 문장은 떨어져나간 목의 개수를 챙길뿐, 떨어져나간 목의 고통을 기록하지 않는다. 매일매일의 목 베기와 목 베기 사이에서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던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기사는 가엾고 사소한 에피소드처럼 끼어 있다. 7세기의 수많은 전투는 매우 복잡하고도 무질서한 정치적 배후를 갖는다. 정치 집단들 사이의 호혜 평등에 따른 공존이란 불가능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잔존 군사력과 당(唐)의 원정군이 뒤엉켜 가변적 적대 관계의 중층 구조를 이루었다. 나-당 사이의 정치관계와 군사관계는 파국적인 모순에 처해 있었다. 문무왕은 눈물겨운 저자세의 외교 문서를 당의 황제에게 보내 당나라의 도덕성과 우월성에 영원히 충성을 맹세한다. 그는 거의 빌고 있다. 그리고 그는 곧 군사를 동원해서, 한반도에 진주한 당의 군사력을 토벌한다. 수사를 아끼는 김부식은 그 시대의 피비린내를 이렇게 전한다.

"들판마다 시체가 가득가득 쌓여 있었고, 흐르는 피에 방패가 떠내려갈 지경이었다"

문무왕의 유서는 '삼국사기' 전편에서 가장 장엄하고도 웅장한 글이다. 그 유서는 제왕의 문장으로 기록된 무기의 꿈이다.

"나는 국운이 마침 어지럽고 전쟁하는 시대를 당하여 서쪽(백제)를 정벌하고 북쪽(고구려)을 토벌하여 능히 강토를 평정하고, 반역한 자를 치고 협조한 자를 불러와서 드디어 먼 곳과 가까운 곳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이 돌보아주심을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아비와 아들의 오래된 원한을 갚아주었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을 널리 추상하여 내외에 관직을 고루 나누어주었으며, 병기를 녹여 농구를 만들었고, 백성들을 인수(仁壽)의 경지로 이끌었다. " - '삼국사기' 이재호 옮김

문무왕의 단정적 어법에도 불구하고 무기에 대한 그의 꿈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먼 곳과 가까운 곳은 끊임없이 불안정했고, 살육과 모반은 거듭되었다.

7세기의 바다에서 악기가 솟아오른다. 그 바다는 929번 지방도로가 끝나는 감포읍 대본리 바다이고, 그 악기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이름의 관악기이다. 문무왕의 시신은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그 뼈까 대본리 앞바다 바위(대왕암)에 뿌려졌고, 문무왕은 동해에서 호국의 용이 되었다. 그리고 이 피리는 신문왕이 그의 아버지 문무왕의 혼백인 용으로부터 받은 피리였다. 용은 바다에서 솟아난 그 피리를 아들에게 전해주었다. '삼국유사'는 인간의 욕망과 슬픔과 기쁨과 환상과 열망에 역사라는 지위를 부여한다. '삼국유사'는 현실의 역사이며 마음의 역사인 것이다. 만파식적에 대한 기록이 없었더라면, 7세기의 역사는 살육과 모반으로 지고 샌 불구의 역사에 불과했을 터이다. 삼국 통일이 어찌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왕이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간직해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떄는 개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다. 이피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 - 삼국유사. 이재호 옮김

Nov 21, 2011

애도,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 정성일

그녀에게는 이 방송이 일종의 해방구이자 공동체이며, 더 나아가 영화를 통해서 좋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일보 전진이 되길 원했다. 사실 그녀와 그 동료들이 함께 만들고자 한 <정영음>의 핵심은 여기에 있었다. 그걸 아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정은임 씨는 나처럼 영화에 매달리지 않았다. 영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썼지만, 그러나 그 노력은 영화를 빌려 세상 안으로 더 깊이, 더 가까이, 더 낮게 다다가고 싶었던 마음의 일부였다.


첫 문장은 백번을 고쳐서 다시 써도 도무지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쓸 생각이다. 그것만이 내가 당신을 불러오는 유일한 방법이기 떄문이다. 혹은 떠나가는 당신을 잠시라도 불러 세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멋지게 쓰려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 슬프다기보다는 그냥 아프다. 죽음이 우리 삶의 일상사의 일부이고, 나는 적지 않은 지인들을 이미 떠나보냈다. 그중에는 당신보다 더 나이 어린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당신과의 작별은 나를 아프게 만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른여섯 살은 세상을 떠나야 할 나이가 아니다. 당신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서 2004년 8월 5일 오후 5시 반에 일원동 삼성병원 영안실 15호실을 찾았다. 당신이 세상을 떠난 지 스물 세시간 만의 일이다. 거기 그렇게 당신은 그냥 사진으로만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숨 막힐 듯한 더위로 가득 찬 채 화창한 햇빛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혹은 집에 돌아오는 길은 달이 휘영청 뜬 채 그렇게 무심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당신을 마지막으로 보러가는 그 순간에만, 영안실까지 가는 그 길목에서만, 비를 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인용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건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당신과 나누었던 영화 이야기들을 떠올려 볼 생각이다.

그해 가을, 그러니까 당신이 스물네 살이 되는 1992년, 그렇게 처음 이제 막 진행을 시작한 '영화음악실'에 나는 게스트로 초대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나오는 것이었고, 그때 프로그램 피디였던 홍동식 씨는 그냥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무 이야기나 하셔도 되고요. 단 하나, 연예계 소식만 전해 주지 않으시면 됩니다." 사실 나는 그 말이 매우 고마웠다. 왜냐하면 그때만 해도 라디오에서 영화는 연예와 이음동의어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처음 방송을 녹음하기 위해 작은 라디오 스튜디오에 갔을 때 거기에는 홍동식 피디 곁에 작고 예쁘장한, 사실 소녀라는 느낌이 더 큰 아나운서가 앉아 있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이 내가 초대받은 첫 번째 라디오 프로그램이 아니었기 떄문에 그 아나운서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예쁘고 귀여운 그녀들은 대부분 교양이 없었으며, 영화에 대해서는 배우들 위외에 별 관심이 없었으며, 텔레비전에 가기 위한 간이역 정도로 라디오를 생각하고 있었으며, 더더구나 게스트가 하는 말은 그냥 잡담 정도로 생각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은임씨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제스처의 과장이 좀 큰 편이다. 작은 편인 걸 자기 자신이 알기 때문에 좀 커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약간 가성이 들어간 상태에서 내게 인사를 했다. 나도 인사를 하면서 그냥 혹시 이 소녀 공주병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방송국이란 곳에 대해서 편견이 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정은임 씨는 처음에는 영화에 대해서 잘 몰랐다. 상대방이 영화에 대해서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 가늠하는 것은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은임씨는 오프닝을 자신이 직접 썼지만,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구성작가들에게 의존했다(그리고 그때 <정영음>의 구성작가들은 그들 자신도 자부심을 느끼는 것처럼 '最强'이었다). 물론 그것이 잘못은 아니다. 나는 영화에 내 사랑을 건 사람이지만 상대에게 그걸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잘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하고 나설 때는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그때 고작 서른네 살에 불과했다. 첫 방송 녹음이 시작되고 그냥 무사히 끝났다. 약속한 시간은 10분이었고, 조금 넘겨서 끝난걸로 기억한다. 사람들은 녹음된 내용만을 듣기 때문에 녹음하기 전에 나누는 대화나, 혹은 중간에 음악을 틀면서 나누는 은밀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알수 없다. 그러나 게스트와 진행자 사이에서 진짜 대화는 대부분 그 막간에 있다. 그때 정은임 씨는 내게 자신이 영화음악실 담당자로서 무언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약간 으스대는 목소리로 "리버 피닉스의 <아이다호>, 정말 좋지 않으세요?"라고 내게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방점은 느닷없다는 데 있다. 그때 이 영화는 일종의 컬트영화였고, 소수자들 만이 이 영화를 찬미할 때였다. 나는 그냥 약간 지겹다는 투로 친절하게 대답했다. "구스 반 산트는 그거보다 먼저 만든 <드럭스토어 카우보이>가 훨씬 좋아요." 대화는 썰렁하게 끝났고, 나는 개의치 않고 짐을 싸서 방송국을 나왔다. 매주 여의도에 한 번씩 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3주 뒤였다. 방송에 들어가기 전에 느닷없이 "<드럭스토어 카우보이>도 좋기는 한데요, 전 여전히 <아이다호>가 더 좋은데요."라고 내게 말했다. 갑자기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게 된 나는 그날 녹음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고 끝을 냇따. 그때는 아직 '어둠의 경로'가 없었고, 개봉되지 않은 영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온갖 수소문 끝에 '비짜' 비디오테이프(말하자면 불법 복사 테이프)를 구해야만 했다. 정은임 씨는 3주 만에 <드럭스토어 카우보이>를 구해서 '자막 없이' 본 다음 내게 그 말을 한 것이다. 나는 돌아가는 길에 혼자 중얼거렸다. 이 여자, 재미있다. 정은임 씨는 그런 사람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 생각에) 그녀의 가장 뛰어난 점은 학습 능력에 있었다. 그녀는 자기 프로그램에 초대받은 게스트들이 무엇을 제일 잘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배웠다. 그것도 매우 전투적으로 배웠다. 말하자면 정은임 씨는 영화를 책이 아니라 일종의 실전 비평을 통해서, 자기 프로그램에 초대받은 게스트들과의 진검 승부를 통해 익혀나간 사람이다.

아주 오래전 사석에서 정은임 씨는 게스트 중에서 박찬욱 감독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때 박찬욱은 '진짜 안 나가는' 감독이었으며, 차라리 그가 쓰는 영화에 관한 글로 영화 '선수'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고 있었다. 나는 정은임 씨가 박찬욱 감독에 대해 지나가듯이 한 멘트를 기억하고 있는데, "박찬욱 감독은 자기 영화를 볼 수 있는 관객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거에요. 그냥 영화에 대해서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 영화 이야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지만,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영화 이야기도 아니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이 여자,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기억하는 나는 올해 초 1월에 그녀의 방송에 초대 되었을 때 한국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물었다. "이제 그때가 온 거라고 생각하세요?" 지난해 겨울 <올드보이>는 이례적인 성공을 했고 아직 칸에 가기 전이었다. 정은임 씨는 "박찬욱 감독은 좀 더 나아갈것 같은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단서를 달았다. "좀 위험하긴 하지만요." 정은임 씨는 가끔 어떤 직관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박찬욱 감독이 지난주 <씨네21>(465호)에 ".....하지만 정은임 씨는 내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재밌어하고, 즐기면서 꼼꼼히 귀 기울여 들어 주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런 경청에서만이 나올 수 있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곤 했다......"라고 쓴 대목을 읽었을 때, 부고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만 웃고 말았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어떤 확신에 차서 웅변조가 되는 사람이다. 혹은 거의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정은임 씨는 질문할 때 정면으로 그냥 콱 찌르는 사람이다. 시시하게 말을 빙빙 돌리거나 아니면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그때 누구라도 일단 멈칫하게 만드는 질문의 예리함은 정은임 씨의 그 꼼꼼한 준비와 직관에서 오는 것이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 그 순간 너도 참 아찔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을 하다가 정말 이런 순간에 걸려들면 쩔쩔매게된다. 나는 그때 한겨레에 매주 영화평을 쓰고 있었는데, 그녀는 매주 꼬박 꼬박 그걸 읽으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그걸 알 게 된 건 한참 뒤에 일이다) 그리고 내가 쓴 영화평을 이야기하기 위해 스튜디오에 들어올 때 정은임 씨는 종종 급소를 찌르는 듯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처음에는 질문 자체가 좀 우스꽝스러웠으나 점점 그 질문은 핵심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보통 방송국은 게스트들을 6개월에 한 번 프로 개편 때마다 '자르는'것이 관례이다. 그걸 알기 떄문에 나는 6개월이라는 주어진 시간 동안 내 멋대로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막 나가고 있었다. 정은임 씨(와 이 프로그램의 피디인 홍동식 씨)는 그걸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나는 점점 약속한 시간을 넘겨서 한 시간인 이 프로그램에서 거의 30분 이상을 떠들어 대곤 했다. 정은임 씨가 좀 곤혹스러워한 건 내가 방송 대본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몇 장의 메모만을 준비한 다음 그걸 보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함께 진행해야 할 정은임 씨는 자신이 아무런 준비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좀 화가 나있었다. 나는 준비된 대본을 읽는 훈련은 한 적이 없기 떄문에 '라이브' 한 쪽을 택했다. 그냥 메모를 보고 생각에 이끌리는 쪽을 따라 이야기를 했다. 그때 내가 한 방송 내용 중에는 '방송 중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이야기한 대목들도 있었다. 그걸 서로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대신 나는 다음 주에 무슨 내용을 할지에 대해서 언제나 정은임 씨와 의논을 했다. (홍동식 피디는 그 문제에 대해서 그냥 믿고 맡기는 타입이었다). 그러면 정은임 씨는 자기 방식으로 준비를 했다. 두 명의 데이비드(린치와 크로넨버그), 키에슬로프스키, 타르코프스키, <블레이드 러너>. 왕가위 혹은 오우삼, 팀 버튼, (코폴라의) <드라큘라>, 세 편의 <에이리언> (아직 카로 - 주네의 네 번째 <에이리언>을 만들어지지 않았다), 허우샤오시엔, 임권택, 명단이 늘어날수록 점점 프로그램은 이상하게 진행되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청취자를 잊어버리고, 정은임 씨를 매주 설득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게스트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건 정은임 씨의 재능이다. 아마 다른 게스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녀는 점점 매우 까다로운 미팅 상대가 되어 갔다. 처음에는 쉽게 설득되었지만, 점점 많은 게스트들과의 만남에서 얻어 낸 경험과 지식, 그리고 영화에 대한 그녀 자신의 이해가 깊어지고 넓어지면서 질문이 많아졌다. 나는 계절이 바뀌어도 '잘리지' 않았고, 그렇게 2년 2개월을 매주 함께했다.

정은임씨가 해낸 많은 것들은 사실 홍동식 피디와 그림자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다. 종종 사람들은 정은임 씨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할 수 있는 수위를 훨씬 넘는 발언과 <인터내셔널>歌의 방송에 대해서 전율하지만, 그것은 프로그램 담당 피디가 직언입으로서의 자기 목숨을 '함께' 걸지 않는 한 힘든 일이다. 또는 영화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은 이미 구성작가들에 의해서 준비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단지 그러한 이유로 정은임 씨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면 정말 이야기되어야 할 이름들은 홍동식 피디와 그 당시의 구성작가들일것이다. 정은임씨의 진짜 훌륭한 점은 자신이 그들의 그림자 아래 그저 분신에 지나지 않는 '카케무샤'가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아나운서들은 구성작가들의 대본에 온기가 감돌도록 안간힘을 쓰지만, 정은임 씨는 그것을 고쳐 가면서까지 자기 생각을 넣으려고 했다. 그저 예쁘게 다듬거나 아니면 멋진 말을 넣고 뺴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넣으려고 했다. 그건 매일 스튜디오에 들어가야 하는 방송의 무시무시한 메커니즘 속에서 거의 필사적인 노력이다. 그녀는 방송을 하면서 자주 아팠다. 겨울에는 감기 때문에 쩔쩔맸고, 봄에는 두통을 아파했다. 여름에는 가벼운 몸살이 자주 걸렸고, 가을에는 그 후유증을 다스리느라고 힘들어했다. 심지어 두 번은 그녀가 미리 녹음해 놓은 인사말이 끝난 다음 마치 그녀가 내 앞에 있는 것처럼 혼자서 그 긴 시간을 녹음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정은임 씨는 <정영음>이 심야에 그저 분위기를 잔뜩 띄우면서 목소리르 낮추고 음악이나 틀어 대는 프로그램으로 잊혀지기를 원치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 방송이 일종의 해방구이자 공동체이며, 더 나아가 영화를 통해서 좋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일보 전진이 되길 원했다. 사실 그녀와 그 동료들이 함께 만들고자 한 <정영음>의 핵심은 여기에 있었다. 그걸 아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정은임 씨는 나처럼 영화에 매달리지 않았다. 영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썼지만, 그러나 그 노력은 영화를 빌려 세상 안으로 더 깊이, 더 가까이, 더 낮게 다다가고 싶었던 마음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만일 정은임 씨는 그녀 자신의 영화가 아니라 음악을, 혹은 문학을, 또는 그 어떤 다른 프로그램을 맡았다 할지라도 같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며 같은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은임 씨가 다시 <정영음>에 돌아온 2004년 1월에 다시 같은 스튜디오에서 만났을 때 그녀에게 "영화는 결국 당신에게 운명 같은 게 아닐까요?"라고 물었다. 그녀 자신도 영화로 돌아온게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편하다고 대답했다. 내가 그 겨울, 거의 8년 만에 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 <정영음>이 제시간에 도착한 편지와 같다고 한 말의 일부는 정은임 씨에게 보내는 내 마음의 연애편지와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내 마음의 편지를 들고 방송에 가서 정은임 씨에게 전달했다. 그녀는 그냥 살짝 웃었다. 언제나 소녀같을 줄 알았던 그녀의 얼굴에도 가볍게 주름살이 눈가에 그려졌다. 정은임씨는 지아장커의 <임소요>를 꼭 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친애하는 당신>이 꼭 보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기회가 없다.) 그녀는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에 가볍게 흥분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녀가 영화를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이다.

내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은 왜 그토록 <정영음>은 방송국에서 미움을 받았을까, 라는 의아함이다. 나는 방송국의 생리를 이해하지 못하며, 더더구나 방송국 프로그램 편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1995년에도 그러했고, 2004년에도 똑같은 과정을 밟으면서 그녀의 방송은 그녀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중단되었다. 정은임 씨가 라디오에서 맞이한 기쁨의 순간은 너무 짧았다. 그녀의 죽음 앞에서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채 해 보지도 못하고 중단되었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죽음은 이르게 올 수도 있고, 더디게 올 수도 있다. 그건 사람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은임씨는 그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단 한가지 안타까움, 방송국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냥 기다림으로 보내야만 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비디오를 소개하거나, 혹은 내일의 날씨를 알리거나,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들은 (내가 보기에)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정은임 씨는 자신을 컨트롤할 때가 아니라, 말 그대로 자기감정을 고스란히 내보이면서, 세상이라는 실패의 모순에 분노를 느끼면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걸 말하기 위해 전력투구할 때 가장 멋잇는 사람이다.

당신이 세상을 떠난 올해 여름은 정말 덥다. 이만큼 더웠던 것은 10년 전 이었다고 한다. 그해 여름 매주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헐떡거리면서 여의도까지 갔었다. 나는 그때 당신에게 영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기 위해서 일주일 내내 준비를 하고 그곳까지 갔다. 내가 떠들기 시작하면, 당신은 아나운서 답지 않게 턱을 고이고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지금 나는 이제 세상에 없는 당신을 위해 이 글을 쓴다. 이편지가 당신에게 도착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이제 나는 누구에는 나의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까? 누가 그렇게 내 영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 줄까? 세상은 점점 시시해져 가고 있고, 나는 점점 쓸쓸해지고 있다. 한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편지를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다. 그 대신 오늘은 당신이 아직도 세상에 남겨 놓은 싸이월드에 찾아가 볼 생각이다. 당신 몰래 당신에게 매주 연애하는 감정을 안고 여의도를 찾아가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던 당신의 영화 친구 정성일 씀. 2004년 8월, 날씨 유난히도 무덥고 맑음.

Jan 27, 2010

김훈이 아들에게 쓰는 글 2


제 생각에 김훈은 그의 문체나,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무래도 역사소설이나 고전문학의 비평에 어울리는 것 같지만, 가장 좋아하는 김훈의 글은 에세이집 '풍경과 상처' 후반부에 나오는 천상병시인에 관한 글과 '바다의 기별'에 실린 박경리를 생각한 글입니다. 천상병과 김훈, 둘은 얼굴을 자주보곤 한 것 같은데, 천상병 시인의 절절한 생활과 시인에 대한 김훈의 사랑스런 시선과 그리움이 그의 글에 녹아있습니다. 시인의 입주변에 끼인 백태의 묘사가 읽는 저에겐 너무나 강렬해서 천상병 시인을 생각하면 백태가 떠오르고, 백태를 생각하면 천상병시인이 연상될 정도입니다.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도 좋게 읽은 글들중 하나 이고, 김훈의 글들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글들중에 하나라 생각합니다. 글을 읽다보면 아들이 청소년기에 느꼈을 압박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러면서도 뼈가 굵고 살이 붙은 아들의 육체를 보는 아버지의 물컹한 마음이 와닿습니다. 매번 만경강하구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탄식을 내뱉는 작가의 모습과 겹치는 것이, 김훈이라는 작가와 글을 한꺼풀 벗겨보면 속수무책으로 가녀린 여인같음을 또 한번 느끼게 되더군요.

딸에 대해 적은 에세이도 한편 있습니다. 포유류 암컷의 씨내림의 슬픔과 딸이 커가는 삶에 대한 경이를 적은 글인데, 그 글에서도 김훈의 글에서 자주 써먹은 "어깨가 둥근"이라는 묘사가 나와 킥킥대며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는 앞서 말했듯이 군복무를 피하고 싶어하는 아들에게 훈계하는 아버지의 메세지입니다. 남한에서 태어난 남자라면 거의 대부분이 행하는 군복무가 뭐가 대단하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한국에서 아들로 태어난 이들과 그들의 아버지들이라면 대부분은 한번쯤 겪어보았을 심상일겁니다. 만약 제 아들이 저에게 군입대를 앞두고 오묘한 눈빛을 보내면, 전 김훈이 쓴 이 글보다 더 잘 쓸 자신이 없어, 이 글을 보여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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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새벽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전화 한 번 없는 너를 기다리며 나는 지금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과 분노를 느끼며 이글을 쓴다. 이 짧은 글을 마치기 전에 대문에 벨소리가 나고 네가 들어오기를 나는 바란다. 하루 종일 집안일에 시달린 너의 어머니도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다.

너는 재미도 없고 신명이 날 리도 없는 국어, 영어, 수학에 주눅들려 노예만도 못한 고등학교 시절과 재수시절을 거쳐서 겨우 대학에 들었갔다. 그러나 너의 젊은 몸의 생명력은, 국.영.수로 너의 정신을 옥죄고 경쟁과 싸움으로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어버린 어른들의 제도보다 힘센 것이어서, 너의 몸은 청년의 건장함으로 자라났다. 지난번 이삿짐을 나를 때도 너는 이미 아버지보다 훨씬 힘이 좋았다. 그리고 너는 징병 심체검사에서 현역복무 판정을 받았고, 이제 입영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이나 국회의원, 장관, 그리고 온갖 돈 많고 권세 높은 댁 도련님들이 무슨 사유에서인지 관행적으로 병역을 면제받아 왔다는 신문기사를 매일 같이 눈독 들여 읽고 있는 너의 눈치를 보면서, 나의 그 참담함은 이 나라의 무수한 힘없는 아버지들의 참담함이었을 터이다. 내가 아들인 너의 눈치를 보면서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너는 결국 너의 그 별것도 아닌 평발 증세를 너의 어머니께 강조하면서 재심받을 방법을 찾아달라고 말했다.

나와 너의 어머니는 다만 무력하게 한숨을 쉴 뿐 아무런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너를 낳아서 청년이 되도록 길렀으며, 남자로 태어나 함께 병역의 의무를 진 내가 너에게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이 나라의 어느 아버지가 징집을 앞둔 아들에게 이 사태를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병역은 남자로 태어난 국민의 가장 신성하고 가장 도덕적인 의무라고 말한들 이미 더럽혀지고 허물어진 신성 앞에서 그 말이 무슨 씨가 먹힐 것인가.

네가 네 또래 녀석들과 어느 엄습한 술집 골목이나 헤매면서 분노와 혼란의 풋술을 마시고 있을 이 새벽에, 나는 너의 교육과정과 성인의식과도 같은 입대 예비과정에서 나라의 제도와 사회, 그리고 남 앞에서 애국적 언동을 해 보이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권세 높은 자들이 너의 그 짧은 생애에 가한 모욕을 생각하면서 잠들지 못한다.

너에게 할말은 아니다만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너를 기르던 세월 속에서 내가 치러야 했던 가혹한 노동과 날이 밝도록 일했던 수 많은 밤의 고난을 생각했다. 세금을 원청징수 당하고, 34개월의 병역을 치르고, 예비군, 민방위 훈련에 참가하고, 교통규칙을 지키고 전기를 절약하고 쓰레기를 줄이고.... 시간외 노동을 밥 먹듯이 하면서도 나라가 시키는대로 끝까지 머리 숙여 모든 일을 다 해온 세월은, 지금 견딜 수 없이 허망하다.

나라를 지키는 일은, 아버지세대가 늙으면 아들 세대가 물려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사인인 아버지가 사인인 아들에게 넘겨주는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공적 아버지와 국가와 국민의 이름으로 이루어 질 수 밖에없다. 그러나 지금 너희들의 그 울분에 찬 새벽 술자리에 공사 간에 어느 아비가 끼어들수 있겠느냐, 아들아, 나는 겨우 이렇게 말하려한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 못난 나라의 못남 속에서 결국 살아내야 한다는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나라의 쪽박을 깨지 않는 일이라고, 너의 의무는 몇몇 비굴한 이탈자에 의하여 신성이 모독 되었지만 송두리째 부정당한 것은 아니라고, 너는 어머니께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 아프고 괴롭겠지만 나라의 더 큰 운명을 긍정하는 사내가 되거라. 네가 긍정해야할 나라의 운명은 너와 동년배인 동족 청년과 대치하는 전선으로 가야하는 일이다. 가서 대통령보다도 국회의원보다도 그리고 애국을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도 더 진실한 병장이 되어라.


Jan 26, 2010

김훈이 아들에게 쓰는 글 1


김훈의 에세이집 중 하나인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를 펼치면 책의 첫번째 글이 '돈과 밥으로 삶은 정당해야 한다' 이고 두번째 글이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이다. 김훈이 원래 책을 펴낼때 달고 싶었던 제목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가 아니라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였다고 한다.

첫번째로 실린 '돈과 밥으로 삶은 정당해야 한다'는 그의 다른 모든 글들을 관통하는, 김훈이 원했던 것처럼 자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액즙같은, 그의 삶의 철학을 말해주는 글이다. 두번째의 글인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또한 아들에게 쓰는 글인데, '돈과 밥으로...' 보다는 훨씬 개인적이고 재밌다. 작가와 작가의 아내에게 평발을 구실로 군복무를 면제받으려 응석을 부리는 아들이 밤늦게 술을 푸고 있을때 작가가 분노와 슬픔으로 적은 글인데. 난 아직 김훈보단 그의 아들과 나이가 더 가까운데다가, 아들을 낳고 길러본 적이 없기에, 김훈이 느끼었을 분노와 슬픔에 젖어 글을 썻을 때보다, 평발을 내밀고 밤늦게 친구들과 잔을 꺾었을 아들의 밤이 더 공감이 가고 안타깝다. 김훈은 국방의 의무를 어떠한 이해나 타산보다, 당위로써 말하고 있다. 책이 출판된 시점을 따지면 아들도 이제 서른줄에 들어섰을 건데, 이젠 자기 아버지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대충은 알 수 있을이다.

'평발....'이 재밌긴 하지만, 이 책을 책장에서 자주꺼내서 보게끔 만드는 글은 맨 처음 실린 '돈과 밥으로 삶은 정당해야 한다'이다. 김훈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을 하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사내라면 노동으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너와 너의 식구들의 입에 밥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읽는 이에 따라서 꼰대냄새나고 고루한 글이지만, 난 잘 읽었고, 친구나 지인에게 자주 소개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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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말 하지 않겠다. 쉬운 말을 비틀어서 어렵게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걸로 밥을 다 먹는 자들도 있는데, 그 또한 밥에 관한 일인지라 하는 수 없다. 다만 연민스러울 뿐이다.

사내의 한 생애가 무엇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이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 더 거룩하고 본질적인 국면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얘야, 돈이 없다면 돈보다 큰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돈 없이 입만을 나불거려서 인의예지이며 수신제가를 이룰 수 있겠느냐? 부(否)라! 돈은 인의예지의 기초다. 물적 토대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워 놓은 모든 것들이 대부분 무너진다. 그것은 인간의 삶의 적이다. 그런 허망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없다. 이것은 유물론이 아니고, 경험칙이다. 이 경험칙은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공히 유효하다. 돈 없이도 혼자서 고상하게 잘난 척하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말아라. 추악하고 안쓰럽고 남세스럽다.

우리는 마땅히 돈의 소중함을 알고 돈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돈을 사랑하고 돈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만이 마침내 삶의 아름다움을 알고 삶을 긍정할 수가 있다. 주머니 속에 돈을 지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대답은 자명한 바 있다. 돈을 벌어야 한다. 우리는 기어코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다. 노동의 고난으로 돈을 버는 사내들은 돈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돈은 지엄한 것이다. 아, '생의 외경', 이 외경스러운 도덕은 밥벌이를 통해서 실현할 수 있다.

돈이 있어야 밥을 먹을 수 있다. 우리는 구석기의 사내들처럼 자연으로부터 직접 먹거리를 포획할 수가 없다. 우리의 먹거리는 반드시 돈을 경유하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노동은 소외된 노동이다. 밥은 끼니 때마다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함께 먹는 것이다. 밥이란 쌀을 삶은 것인데, 그 의미 내용은 심오하다. 그것은 공맹노장보다 심오하다. 밥에 비할진대, 유물론이나 유심론은 코흘리개의 장난만도 못한 짓거리다. 다 큰 사내들은 이걸 혼돈해서는 안 된다. 밥은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윤기 흐르는 낟알들이 입 속에서 개별적으로 씹히면서도 전체로서의 조화를 이룬다. 이게 목구멍을 넘어갈 때 느껴지는 그 비릿하고도 매끄러운 촉감, 이것이 바로 삶인 것이다. 이것이 인륜의 기초이며 사유의 토대인 것이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모든 먹이 속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우리는 먹이를 무는 순간에 낚싯바늘을 동시에 물게 된다. 낚시를 발려내고 먹이만을 집어먹을 수는 없다. 세상은 그렇게 어수룩한 곳이 아니다. 낚싯바늘을 물면 어떻게 되는가. 입천장이 꿰여져서 끌려가게 된다. 이 끌려감의 비극성을 또한 알고, 그 비극과 더불어 명랑해야 하는 것이 사내의 길이다.

돈과 밥의 지엄함을 알라. 그것을 알면 사내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아는 것이고, 이걸 모르면 영원한 미성년자이다. 돈과 밥 위에서, 돈과 밥으로 더불어 삶은 정당해야 한다. 알겠느냐? 그러니 돈을 벌어라. 벌어서 아버지한테 달라는 말이 아니다. 네가 다 써라. 난 나대로 벌겠다.


Jan 19, 2010

김추자

술을 먹고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난방하지 않는 겨울날 밤은 추웠다. 의자와 나의 무게에 방바닥과 의자바퀴는 서로 밀어대면서 우지직거렸다. 밖에서 마신 술이 아쉬워서 찬장을 열어봤으나 남은 술이 없었다. 보나마나한 신문기사를 인터넷에서 보다 김추자 노래를 틀었다.

김추자의 노래는 요즘 유행에 맞지않는다. 그래서 밖에서 김추자의 노래를 듣기는 여의치 않다. 아니, 내가 가는 곳에서는 김추자의 노래를 잘 틀지않는다. 내가 가는 음악이 목적인 곳이나 음악이 목적이 아닌 장소에선 김추자의 노래를 듣지 못하였다. 김추자의 노래는 요즘 유행하지 않지만, 김추자의 목소리는 유행을 타지 않는다. 김추자의 목소리와 유행과는 서로 무효한 관계다. 양희은과 심수봉의 목이 그렇듯이, 김추자의 목소리는 그렇다.

내가 김추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대체로 신기하게 여긴다. 내 또래엔 김추자를 모르는 이가 김추자를 아는 이보다 훨씬 많다. 나의 또래나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그 이야기가 '김추자'에까지 닿으면, 대부분의 반응은 "그게 누군가" 이고 그것보다 훨씬 더 적은이가 취향이 고루하고 노티난다고 한다. 김추자의 목소리는 커녕,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르니 음악이야기가 나올때마다 그녀가 얼마나 훌륭한 목소리를 지닌 가수이고, 노래가 얼마나 좋고 들을만한지 이야기를 하려해도 잘 통하질 않는다.

부산에 있는 무역회사에서 일할적이었다. 여름날 회사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거래처 직원들과 오후부터 마신 술에 더워 땀이 많이 흘렀는데 가게 옆 아스팔트길에서 올라오는 열에 숨까지 무거워지는 기분이라, 빨리 판을 나오고 싶었으나 그러질 못하였다. 그 더움이 힘겨워 의자에 몸을 눕히었는데 김추자의 '님은 먼곳에'가 식당에서 흘러나왔다. 노래가 반가워 듣고 있는데, 아버지나이 또래의 거래처 직원이 나에게 김추자를 아냐고 물어서, 좋아한다고 답하엿다. 그 또한 자기 아들 또래의 젊은이가 김추자의 노래를 즐기는것이 퍽 신기하였을 것이다. 그 오래 계속된 술자리가 끝나고, 택시를 타고 중앙동에서 번영로로 집이있는 해운대로 가고 있었다. 에어콘을 틀면 나오는 기름끼 끼여있는 냄새가 싫어 창문을열고 가고 있었는데, 도로에서 자글거리는 열이 창문 밖으로 내놓은 팔을 때렸다. 라디오에서 김추자의 '빗속의 여인'이 나왔다. 청량감. 그 서늘하며도 몽롱한 목소리는 얼마나 황홀한가. 여름날 오후 6시에, 소주를 마시고 습한날씨에 데워진 다리, 무릎뒤편에 고인 끈적한 땀을 이물감이 느껴지게 만들었다. 양복을 거의 대부분 적실만큼 흐른 땀과 내가 내뱉는 숨과 도로가 뱉어내는 더위와 함께, 난 번영로를 달리는 택시위에서 사정감을 느끼며 녹을 것 같았다. 안과 밖, 거죽도 내장도 모두 뒤섞이어 천천히 땅으로 스며들것 같았다.

김훈은 김추자가 어지럽다지만, 김추자의 목소리는 어지러움과 환각을 표방한 청량감이라고 생각한다. 그 속절없음으로 발기했다 부침을 거듭하는 환각과 도발의 계곡은 결국 모르스부호의 그 막대처럼 점으로 수렴되지 않는가. 김훈이 김추자와 양희은과 심수봉을 즐겨 듣는다고 했을때, 나는 반가웠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여가수들을 좋아한다니 반가웠다. 나보다는 산 날이 훨씬 많은 김훈이니 나보다 김추자를 더 많이 들었겠지만, 나는 김추자의 목소리를 그렇게 기억할것이다.

만나는 사람들과 여러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할때, 음악이야기가 나와서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고 취향을 물어보면, 나는 장영주나 루벤슈타인, 레드제플린이나 블랙사바스보다 김추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는걸 듣는게 더 반갑다. 단순히 김추자가 언급되는 빈도수가 적어서 그런것일 수도 있겠지만은, 그 목소리를 닮은 이들이 없고, 더는 그런 목소리를 못듣는 다는게 아쉬워서 그렇다.

Dec 15, 2009

유기

3월 4일 토요일에, 아버지는 봄이 오자 죽었다. 추위가 녹지 않은 봄이었다. 죽는 자에게 죽음까지의 이르는 거리는 죽는 자의 몫이고, 그 뒤는 남겨진 자의 일이라곤 하였으나, 아버지는 당신의 목숨이 죽음에 당도하는, 오직 그만이 마주해야 하는 과정마저 다른 누군가에게 일임한 듯한채로 죽었다. 아버지의 나이 69세였다, 그의 사인死因은 노환에 따른 급성 심부전증의 악화였다.
봄비가 슬레이트 지붕을 때리고 있었다. 장례는 간소하였다. 면식없는 노인들 몇이 왔다갔으며, 아버지의 배인지 씨인지가 다른 종종 얼굴을 보았던 작은 아버지가 정종을 내려놓고 갔다. 이 극도의 빈곤에서도, 시신을 불붙여 태우거나 물렁한 땅을 찾아 속히 묻지않고, 장례의 절차를 간신히 지탱하듯이 벌여놓는 꼴이 신기하고 가엾었다.

발인 전날, 쥐색빛 여름용 양복을 입은채로 자고 있는데, 피워놓았던 향의 매캐한 내와 편육의 고기누린내가 섞이어 퍼진 냄새에 일어났다. 어머니가 냉장고에서 편육을 꺼내어 먹고 있었다. 방에 불을 켠 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컵에 따르고, 행주로 어머니의 손을 닦고, 젓가락을 손에 쥐어주고 다시 잤다. 예전부터 어머니는 밤에만 먹었다. 요 몇년 간, 아버지의 기력이 쇠하였을때는 그러질 않고, 아침과 낮에도 먹었는데, 아버지가 죽은지 이틀후 다시 해가 떠있을 동안 아무것도 먹질않다가, 저녁이 되면 먹는 것이었다.

다음 날 관을 땅에 넣고 매장을 마치자, 이 짧고 지리멸렬한 작업이 끝나 좋았다. 산을 내려오며 아버지가 예를 갖추어 자신의 죽음을 기리길 원했을지 생각하니 그건 아니였다. 그럼 마땅히 그가 살아생전 죽음을 기릴정도의 인생이 있다치면 그 인생의 반턱 가깝게라도 그의 생을 소비하였나하고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닌 듯 하다. 유가족되는 나와 어머니가 이 짓을 원하는 것은 나는 물론이거니와 어머니도 아닐 것이다. 나는 계속 산을 내려갔다. 어제 비가 와서인지 땅이 질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서에 접수되어, 사망확인이 인증되고, 보건복지부에서는 내 가족을 생활보호대상자의 차상위 계층에서 상위계층으로 조정하였다. 티비에 출연한 복지부장관이 서민들은 날로 힘들어하며 생애가장자리로 쫓기어나고 있는데다가, 소외된 계층은 절벽에 매달려있는 꼴이고, 그들을 매달아주는 밧줄이라는게 이번에 새로이 예산이 편성된 지원금에 대한 설명이라며 읍소하던것을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의 가족은 이제 떨어질만큼 밀려나 밧줄이 필요한 가정이 된 것이다. 69세 무직자의 죽음이 어찌해서 변한 것 없는 나의 가족을 좀 더 '붕괴'되고 '연민'스럽게 만드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장관이 말한 그런 절벽이 있다면, 사람은 그 안쪽으로든 바깥쪽으로든 움직이지않고, 다만 그 절벽이 깎여지고 늘여짐에 따라 인간들이 추락하고 엉겨붙는 것 같았다.

동사무소에 갔다가 집에오니 어머니는 웅크려 자고 있다. 어머니의 정신은 편치 않다, 정신과 몸이 편치 않다. 나는 어머니의 나이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언젠가 들은 걸로 셈을 해보면 어머니의 나이는 40세이기도 하고, 42세이기도 하였다. 햇빛 밝은 날 어머니를 바라보면 영 어리게 보였다. 어머니가 한국에와 살기전에, 어머니는 몽골, 온더얼한인가 온도르칸이라는 곳에서 나고 자랐다고 들었다. 생계가 궁핍하였던 어머니의 가족은 어머니를 한국으로 보냈다. 속수무책으로 내려앉는 소련의 경제붕괴는, 몽골을 예외로 두고 있지 않았다. 44살의 한국 노총각은 180만원을 달라는 브로커와 '쇼부'를 보고 140만원을 주고, 10대 몽골 여자와 혼인하였다. 오래 전 일이였다.

난 24세의 무직자이다. 중학교를 중퇴하여, 학력미달의 사유로 난 군대에 입대하지 않았다. 근처 철물소와 고물상에서 일 하고 받은 돈으로 술사마시고 밥을 먹었다. 어머니와 내가 사는 곳은 경북 고령군 산곡리이다. 언제부터 여기서 살게 되었는지는 생생하지는 않지만, 내가 중학교를 그만 둘 즈음이었던걸로 기억난다. 내가 어릴적엔 조금 더 큰 도시에서 살았었다. 어머니는 주로 음식점에서 소일하곤 하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일하지 않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또한 내가 친구들과 노는 것도 그리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넌 저런 놈들과 어울려 놀지 않아야한다. 넌 저기 남지나해 건너서 온 그런 베트콩들 피섞인 새끼들이 아니다. 처신을 단단히 해라. 아버지는 학교에 제출해야하는 가정사항 조사서에 어머니의 이름과 생판 다른 이름을 적어냈었다. 나는 왜 나를 낳은 어머니가 버젓이 집에 있고, 말을 하며, 나를 밥먹여주고 있는데, 학교에 내어야하는 종이에 나의 어머니 대신 다른 이름이 들어가야 하는지 궁금하였고 한편으로 억울하였다. 학교에선 날 코시안가정이라고 명명했다. 학년이 바뀔때마다, 반의 아이들은 나보고 잡종같이 생기지 않았는데, 은근히 다르게 생기긴 했다며 재미있어 하였다. 그중에 몇은 나를 반잡종을 줄여 반잡이라 불렀다. 중학교 어느 때에, 선생님은 코시안이 차별성이 내포된 단어라며, 앞으로 동사무소나 구청, 학교같은 곳에선 온두리안이라는 호칭을 사용할꺼라고 말하였다. 온두리안, 생소한 단어였다. 분명 출석부 명단 구석에 코시안가정임을 나타내는 내 이름옆 체크표시가 있었는데, 온두리안이라는 말을 쓴다고 한 첫날 학교에 갔을때도 그 체크표시는 없어지지 않고 있었다. 혼혈가정과 코시안과 온두리안의 차이점을 난 몰랐었고 지금도 모른다. 분명 그 단어는 같은 뜻을 가질터이고, 부르는 이들 또한 그것을 필히 알것인데도 그 호칭들은 부지런히 변하였다. 그 부지런한 단어의 변화들이 가지는 파동은 내 세계가 느끼기엔 너무 멀었거나, 내가 둔하여 알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그건 번쩍이며 사치스러운거 같아, 아직까지 나에겐 막연하다.

내가 초등학교를 나오고 중학교에 입학하며 중학교를 그만두고, 잡일을 하며 돈을 벌때까지 아버지는 일을 계속해서 규칙적으로 하지 못하였다. 아니, 규칙적으로 돈을 집에 가져오지 않았다. 중학교때까지 내가 입고, 세금을 내고, 가끔식 집안의 가재를 사며, 나와 어머니와 아버지가 먹었던 밥은 압도적으로 어머니의 노동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개의치않아하였고 어머니도 표면적으로 원망하지 않는 듯 했다, 아니 그 전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이 간헐적으로 약해지거나 잠깐 멈추어지는 그 지점에 안도 할수 있을 따름이었다. 아버지는 자주 때렸다. 나도 맞긴하였으나 어머니에 비할바는 아니였다. 밥을 많이 먹는다고 때렸고, 내가 공부를 못한다고 때렸고, 일하는 동안 집안일에 소홀하다고 때렸고, 돈을 못벌어온다고 때렸다.

6학년 때, 나와 어머니가 밥을 먹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들어와 어머니를 때렸다. 어머니는 며칠을 심하게 앓아 누었다. 위와 아래에서 피가 나왔고, 울며 토했다. 그 날 이후로 어머니는 낮엔 먹질 않았다. 아버지가 있든 없든 간에 해가지면 불을켜지 않고 달그락거리며 음식을 씹고 넘기는 어머니의 허기지고 다급한 숨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며칠 앓아누은 그즈음날, 아버지는 술에 취하여 울며 집에왔다. 울면서 통닭을 사왔다. 집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울며 엎드리고 안고 콧물과 눈물을 비비며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난 어머니와 날 때릴적에 아버지보다, 그렇게 어머니의 몸에 자신를 문대는 그 때의 아버지가 더 무서웠다. 그 날 아버지가 잠들었을때도, 어머니는 밤이 되서야 닭고기를 먹었다. 나도 닭고기가 매우 먹고싶었는데, 어머니는 우악스럽게 고기를 먹었다. 그 기름에 묻어 밤에도 번들거린 어머니 손과 울면서 코가막혀 콧물이 흐르면서도 계속해 닭을 입으로 밀어넣던 어머니의 얼굴이 무서워 고기에 손 댈수 없었다. 그 날 새벽 난 누워서 생각하였다. 어머니가 이상하고 싫었다. 왜 어머니는 여기서 도망치지 않는 것인가, 어머니는 어쩌면 선녀와 나무꾼처럼 아버지에게 치명적 약점이 잡힌 것 아닐까. 왜 나를 데리고 여기를 떠나 징기스-칸이 말 몰았다던 그 넓은 어머니의 고향으로 가지 않는 것인가. 말타고, 포유류의 젖을 짜고, 활 쏘는 것을 상상하였다. 사람먹는 짐승이 있고, 티비가 없고, 친구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건너방에서 아버지의 코골며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울었다. 넓은 평야에서 말을 탄채, 징기스칸과 같이 하늘로 활 쏘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중학교에 입학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꾸었다.

집안에 들어와서 신발을 벗고, 옷도 갈아입지않은채 자고 있는 어머니 옆에 나도 누웠다. 어머니에게서 아직 가시지 않은 기름낀 음식의 냄새가 났다. 이 불유쾌한 지루함이 언제 끝날지 나는 종잡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시체가 땅밑으로 들어갈때, 난 어머니를 같이 구덩이에 넣어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돌을 깔아 수천번 두드려밟아서, 나 홀로 오롯이 태어남을 느끼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는데, 다시 방안에 자고 있는 어머니의 냄새를 맡자 그 욕구가 솓아올랐다. 글쎄, 서울 그 어딘가, 사람이 넘쳐 흐르는 거리 어딘가에 버리면 괜찮지 않을까, 정신나간 어머니가 다시 그 먼 서울에서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진 못할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어머니가 너무 가여웠다. 어머니를 계속하여 이 세상에 유기시키다니, 어머니는 죽어서, 죽음으로써 탈출해야 하는 거 아닌가하는 주제넘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울며 닭을 먹던 모습과, 그 기름 범벅 된 손이 생각났다. 손에 묻은 그 기름이 아래로 낙하하여 바다를 이루고, 그 바다에서 허우적대다 깊숙히 떨어지는 어머니의 육신을 상상하였다. 그리고 그 육신이 점점 퇴화되어, 갑각류 비슷한 것이 되어 지저 깊숙히 숨어들어가 거기서 어머니가 찾을 평화로움을 생각하려 했는데, 그 평화로움은 생각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밥먹을 때 생기는, 혀와 이와 음식물이 내는 소리와, 그릇이 부딛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허기지고 다급한 비명같은 소리. 처음에는 작게 들리던 그 소리가 점점 박자를 맞춰 크게 들렸다. 그 환청에 가위눌려 일어났다. 고개를 돌리니 어머니는 자고 있었다.

다시 누워, 어머니의 고향 몽골을 생각했다. 티비와 책에서 본 파란초원과 하얀하늘을 떠올리며 그 평원과 하늘에 어머니를 방류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좋지않은 장소와 시간에 사지가 갈려지고있는 사람아닌 다른 생물처럼 느껴졌다. 애초에 사람이 아니라, 그 다른 무언가에서 생겨난 것이라, 이처럼 저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 생물의 밑에서 나온 나도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녹아서 없어지고 싶다. 애초에 여기 있지 않았을 어머니가 다시 당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면, 그녀의 결과인 나 또한 원래 없었을 것처럼, 내가 누워있는 바닥에 나의 옷만남기고, 원자처럼 붕괴되고 싶었다. 점퍼를 입고 누워서 그런지 겨드랑이와 가슴팍에서 땀이 났다. 봄이되어 밤이 춥지않았다. 외투를 벗어 옆으로 치워놓고 다시 누웠다. 내일부터 다시 일거리를 알아보아야 할것이다. 오늘은 징기스칸과 활쏘는 꿈을 꾸고 싶다. 어머니는 자고 있다.

Dec 6, 2009

수음의 끝

사랑이 무엇을 말하는 단어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육욕肉慾 언저리에서 부침을 거듭하는 마음을 사랑이라 하며, 피와 살 엉겨붙은 씨내림의 그 섬뜩한 무게감을 사랑이라 했다. 수 많은 낮과 밤이 만들어온 경과가 가져다 준 걸 사랑이라 했고, 이십일된 강아지의 부서질 것 같은 움직임, 그 가여움을 사랑이라 한다.

나는 외국어를 못하여 안타까웠다. 분명 지상어딘가에는, 이 사랑이라고 하는 넘실대며 커다란 것을 열과 행으로 쪼개어, 모조리 나누어 줄 수 있는 언어가 있을터인데.

오늘도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