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자의 노래는 요즘 유행에 맞지않는다. 그래서 밖에서 김추자의 노래를 듣기는 여의치 않다. 아니, 내가 가는 곳에서는 김추자의 노래를 잘 틀지않는다. 내가 가는 음악이 목적인 곳이나 음악이 목적이 아닌 장소에선 김추자의 노래를 듣지 못하였다. 김추자의 노래는 요즘 유행하지 않지만, 김추자의 목소리는 유행을 타지 않는다. 김추자의 목소리와 유행과는 서로 무효한 관계다. 양희은과 심수봉의 목이 그렇듯이, 김추자의 목소리는 그렇다.
내가 김추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대체로 신기하게 여긴다. 내 또래엔 김추자를 모르는 이가 김추자를 아는 이보다 훨씬 많다. 나의 또래나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그 이야기가 '김추자'에까지 닿으면, 대부분의 반응은 "그게 누군가" 이고 그것보다 훨씬 더 적은이가 취향이 고루하고 노티난다고 한다. 김추자의 목소리는 커녕,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르니 음악이야기가 나올때마다 그녀가 얼마나 훌륭한 목소리를 지닌 가수이고, 노래가 얼마나 좋고 들을만한지 이야기를 하려해도 잘 통하질 않는다.
부산에 있는 무역회사에서 일할적이었다. 여름날 회사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거래처 직원들과 오후부터 마신 술에 더워 땀이 많이 흘렀는데 가게 옆 아스팔트길에서 올라오는 열에 숨까지 무거워지는 기분이라, 빨리 판을 나오고 싶었으나 그러질 못하였다. 그 더움이 힘겨워 의자에 몸을 눕히었는데 김추자의 '님은 먼곳에'가 식당에서 흘러나왔다. 노래가 반가워 듣고 있는데, 아버지나이 또래의 거래처 직원이 나에게 김추자를 아냐고 물어서, 좋아한다고 답하엿다. 그 또한 자기 아들 또래의 젊은이가 김추자의 노래를 즐기는것이 퍽 신기하였을 것이다. 그 오래 계속된 술자리가 끝나고, 택시를 타고 중앙동에서 번영로로 집이있는 해운대로 가고 있었다. 에어콘을 틀면 나오는 기름끼 끼여있는 냄새가 싫어 창문을열고 가고 있었는데, 도로에서 자글거리는 열이 창문 밖으로 내놓은 팔을 때렸다. 라디오에서 김추자의 '빗속의 여인'이 나왔다. 청량감. 그 서늘하며도 몽롱한 목소리는 얼마나 황홀한가. 여름날 오후 6시에, 소주를 마시고 습한날씨에 데워진 다리, 무릎뒤편에 고인 끈적한 땀을 이물감이 느껴지게 만들었다. 양복을 거의 대부분 적실만큼 흐른 땀과 내가 내뱉는 숨과 도로가 뱉어내는 더위와 함께, 난 번영로를 달리는 택시위에서 사정감을 느끼며 녹을 것 같았다. 안과 밖, 거죽도 내장도 모두 뒤섞이어 천천히 땅으로 스며들것 같았다.
김훈은 김추자가 어지럽다지만, 김추자의 목소리는 어지러움과 환각을 표방한 청량감이라고 생각한다. 그 속절없음으로 발기했다 부침을 거듭하는 환각과 도발의 계곡은 결국 모르스부호의 그 막대처럼 점으로 수렴되지 않는가. 김훈이 김추자와 양희은과 심수봉을 즐겨 듣는다고 했을때, 나는 반가웠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여가수들을 좋아한다니 반가웠다. 나보다는 산 날이 훨씬 많은 김훈이니 나보다 김추자를 더 많이 들었겠지만, 나는 김추자의 목소리를 그렇게 기억할것이다.
만나는 사람들과 여러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할때, 음악이야기가 나와서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고 취향을 물어보면, 나는 장영주나 루벤슈타인, 레드제플린이나 블랙사바스보다 김추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는걸 듣는게 더 반갑다. 단순히 김추자가 언급되는 빈도수가 적어서 그런것일 수도 있겠지만은, 그 목소리를 닮은 이들이 없고, 더는 그런 목소리를 못듣는 다는게 아쉬워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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