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 토요일에, 아버지는 봄이 오자 죽었다. 추위가 녹지 않은 봄이었다. 죽는 자에게 죽음까지의 이르는 거리는 죽는 자의 몫이고, 그 뒤는 남겨진 자의 일이라곤 하였으나, 아버지는 당신의 목숨이 죽음에 당도하는, 오직 그만이 마주해야 하는 과정마저 다른 누군가에게 일임한 듯한채로 죽었다. 아버지의 나이 69세였다, 그의 사인死因은 노환에 따른 급성 심부전증의 악화였다.
봄비가 슬레이트 지붕을 때리고 있었다. 장례는 간소하였다. 면식없는 노인들 몇이 왔다갔으며, 아버지의 배인지 씨인지가 다른 종종 얼굴을 보았던 작은 아버지가 정종을 내려놓고 갔다. 이 극도의 빈곤에서도, 시신을 불붙여 태우거나 물렁한 땅을 찾아 속히 묻지않고, 장례의 절차를 간신히 지탱하듯이 벌여놓는 꼴이 신기하고 가엾었다.
발인 전날, 쥐색빛 여름용 양복을 입은채로 자고 있는데, 피워놓았던 향의 매캐한 내와 편육의 고기누린내가 섞이어 퍼진 냄새에 일어났다. 어머니가 냉장고에서 편육을 꺼내어 먹고 있었다. 방에 불을 켠 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컵에 따르고, 행주로 어머니의 손을 닦고, 젓가락을 손에 쥐어주고 다시 잤다. 예전부터 어머니는 밤에만 먹었다. 요 몇년 간, 아버지의 기력이 쇠하였을때는 그러질 않고, 아침과 낮에도 먹었는데, 아버지가 죽은지 이틀후 다시 해가 떠있을 동안 아무것도 먹질않다가, 저녁이 되면 먹는 것이었다.
다음 날 관을 땅에 넣고 매장을 마치자, 이 짧고 지리멸렬한 작업이 끝나 좋았다. 산을 내려오며 아버지가 예를 갖추어 자신의 죽음을 기리길 원했을지 생각하니 그건 아니였다. 그럼 마땅히 그가 살아생전 죽음을 기릴정도의 인생이 있다치면 그 인생의 반턱 가깝게라도 그의 생을 소비하였나하고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닌 듯 하다. 유가족되는 나와 어머니가 이 짓을 원하는 것은 나는 물론이거니와 어머니도 아닐 것이다. 나는 계속 산을 내려갔다. 어제 비가 와서인지 땅이 질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서에 접수되어, 사망확인이 인증되고, 보건복지부에서는 내 가족을 생활보호대상자의 차상위 계층에서 상위계층으로 조정하였다. 티비에 출연한 복지부장관이 서민들은 날로 힘들어하며 생애가장자리로 쫓기어나고 있는데다가, 소외된 계층은 절벽에 매달려있는 꼴이고, 그들을 매달아주는 밧줄이라는게 이번에 새로이 예산이 편성된 지원금에 대한 설명이라며 읍소하던것을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의 가족은 이제 떨어질만큼 밀려나 밧줄이 필요한 가정이 된 것이다. 69세 무직자의 죽음이 어찌해서 변한 것 없는 나의 가족을 좀 더 '붕괴'되고 '연민'스럽게 만드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장관이 말한 그런 절벽이 있다면, 사람은 그 안쪽으로든 바깥쪽으로든 움직이지않고, 다만 그 절벽이 깎여지고 늘여짐에 따라 인간들이 추락하고 엉겨붙는 것 같았다.
동사무소에 갔다가 집에오니 어머니는 웅크려 자고 있다. 어머니의 정신은 편치 않다, 정신과 몸이 편치 않다. 나는 어머니의 나이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언젠가 들은 걸로 셈을 해보면 어머니의 나이는 40세이기도 하고, 42세이기도 하였다. 햇빛 밝은 날 어머니를 바라보면 영 어리게 보였다. 어머니가 한국에와 살기전에, 어머니는 몽골, 온더얼한인가 온도르칸이라는 곳에서 나고 자랐다고 들었다. 생계가 궁핍하였던 어머니의 가족은 어머니를 한국으로 보냈다. 속수무책으로 내려앉는 소련의 경제붕괴는, 몽골을 예외로 두고 있지 않았다. 44살의 한국 노총각은 180만원을 달라는 브로커와 '쇼부'를 보고 140만원을 주고, 10대 몽골 여자와 혼인하였다. 오래 전 일이였다.
난 24세의 무직자이다. 중학교를 중퇴하여, 학력미달의 사유로 난 군대에 입대하지 않았다. 근처 철물소와 고물상에서 일 하고 받은 돈으로 술사마시고 밥을 먹었다. 어머니와 내가 사는 곳은 경북 고령군 산곡리이다. 언제부터 여기서 살게 되었는지는 생생하지는 않지만, 내가 중학교를 그만 둘 즈음이었던걸로 기억난다. 내가 어릴적엔 조금 더 큰 도시에서 살았었다. 어머니는 주로 음식점에서 소일하곤 하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일하지 않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또한 내가 친구들과 노는 것도 그리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넌 저런 놈들과 어울려 놀지 않아야한다. 넌 저기 남지나해 건너서 온 그런 베트콩들 피섞인 새끼들이 아니다. 처신을 단단히 해라. 아버지는 학교에 제출해야하는 가정사항 조사서에 어머니의 이름과 생판 다른 이름을 적어냈었다. 나는 왜 나를 낳은 어머니가 버젓이 집에 있고, 말을 하며, 나를 밥먹여주고 있는데, 학교에 내어야하는 종이에 나의 어머니 대신 다른 이름이 들어가야 하는지 궁금하였고 한편으로 억울하였다. 학교에선 날 코시안가정이라고 명명했다. 학년이 바뀔때마다, 반의 아이들은 나보고 잡종같이 생기지 않았는데, 은근히 다르게 생기긴 했다며 재미있어 하였다. 그중에 몇은 나를 반잡종을 줄여 반잡이라 불렀다. 중학교 어느 때에, 선생님은 코시안이 차별성이 내포된 단어라며, 앞으로 동사무소나 구청, 학교같은 곳에선 온두리안이라는 호칭을 사용할꺼라고 말하였다. 온두리안, 생소한 단어였다. 분명 출석부 명단 구석에 코시안가정임을 나타내는 내 이름옆 체크표시가 있었는데, 온두리안이라는 말을 쓴다고 한 첫날 학교에 갔을때도 그 체크표시는 없어지지 않고 있었다. 혼혈가정과 코시안과 온두리안의 차이점을 난 몰랐었고 지금도 모른다. 분명 그 단어는 같은 뜻을 가질터이고, 부르는 이들 또한 그것을 필히 알것인데도 그 호칭들은 부지런히 변하였다. 그 부지런한 단어의 변화들이 가지는 파동은 내 세계가 느끼기엔 너무 멀었거나, 내가 둔하여 알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그건 번쩍이며 사치스러운거 같아, 아직까지 나에겐 막연하다.
내가 초등학교를 나오고 중학교에 입학하며 중학교를 그만두고, 잡일을 하며 돈을 벌때까지 아버지는 일을 계속해서 규칙적으로 하지 못하였다. 아니, 규칙적으로 돈을 집에 가져오지 않았다. 중학교때까지 내가 입고, 세금을 내고, 가끔식 집안의 가재를 사며, 나와 어머니와 아버지가 먹었던 밥은 압도적으로 어머니의 노동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개의치않아하였고 어머니도 표면적으로 원망하지 않는 듯 했다, 아니 그 전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이 간헐적으로 약해지거나 잠깐 멈추어지는 그 지점에 안도 할수 있을 따름이었다. 아버지는 자주 때렸다. 나도 맞긴하였으나 어머니에 비할바는 아니였다. 밥을 많이 먹는다고 때렸고, 내가 공부를 못한다고 때렸고, 일하는 동안 집안일에 소홀하다고 때렸고, 돈을 못벌어온다고 때렸다.
6학년 때, 나와 어머니가 밥을 먹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들어와 어머니를 때렸다. 어머니는 며칠을 심하게 앓아 누었다. 위와 아래에서 피가 나왔고, 울며 토했다. 그 날 이후로 어머니는 낮엔 먹질 않았다. 아버지가 있든 없든 간에 해가지면 불을켜지 않고 달그락거리며 음식을 씹고 넘기는 어머니의 허기지고 다급한 숨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며칠 앓아누은 그즈음날, 아버지는 술에 취하여 울며 집에왔다. 울면서 통닭을 사왔다. 집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울며 엎드리고 안고 콧물과 눈물을 비비며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난 어머니와 날 때릴적에 아버지보다, 그렇게 어머니의 몸에 자신를 문대는 그 때의 아버지가 더 무서웠다. 그 날 아버지가 잠들었을때도, 어머니는 밤이 되서야 닭고기를 먹었다. 나도 닭고기가 매우 먹고싶었는데, 어머니는 우악스럽게 고기를 먹었다. 그 기름에 묻어 밤에도 번들거린 어머니 손과 울면서 코가막혀 콧물이 흐르면서도 계속해 닭을 입으로 밀어넣던 어머니의 얼굴이 무서워 고기에 손 댈수 없었다. 그 날 새벽 난 누워서 생각하였다. 어머니가 이상하고 싫었다. 왜 어머니는 여기서 도망치지 않는 것인가, 어머니는 어쩌면 선녀와 나무꾼처럼 아버지에게 치명적 약점이 잡힌 것 아닐까. 왜 나를 데리고 여기를 떠나 징기스-칸이 말 몰았다던 그 넓은 어머니의 고향으로 가지 않는 것인가. 말타고, 포유류의 젖을 짜고, 활 쏘는 것을 상상하였다. 사람먹는 짐승이 있고, 티비가 없고, 친구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건너방에서 아버지의 코골며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울었다. 넓은 평야에서 말을 탄채, 징기스칸과 같이 하늘로 활 쏘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중학교에 입학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꾸었다.
집안에 들어와서 신발을 벗고, 옷도 갈아입지않은채 자고 있는 어머니 옆에 나도 누웠다. 어머니에게서 아직 가시지 않은 기름낀 음식의 냄새가 났다. 이 불유쾌한 지루함이 언제 끝날지 나는 종잡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시체가 땅밑으로 들어갈때, 난 어머니를 같이 구덩이에 넣어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돌을 깔아 수천번 두드려밟아서, 나 홀로 오롯이 태어남을 느끼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는데, 다시 방안에 자고 있는 어머니의 냄새를 맡자 그 욕구가 솓아올랐다. 글쎄, 서울 그 어딘가, 사람이 넘쳐 흐르는 거리 어딘가에 버리면 괜찮지 않을까, 정신나간 어머니가 다시 그 먼 서울에서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진 못할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어머니가 너무 가여웠다. 어머니를 계속하여 이 세상에 유기시키다니, 어머니는 죽어서, 죽음으로써 탈출해야 하는 거 아닌가하는 주제넘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울며 닭을 먹던 모습과, 그 기름 범벅 된 손이 생각났다. 손에 묻은 그 기름이 아래로 낙하하여 바다를 이루고, 그 바다에서 허우적대다 깊숙히 떨어지는 어머니의 육신을 상상하였다. 그리고 그 육신이 점점 퇴화되어, 갑각류 비슷한 것이 되어 지저 깊숙히 숨어들어가 거기서 어머니가 찾을 평화로움을 생각하려 했는데, 그 평화로움은 생각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밥먹을 때 생기는, 혀와 이와 음식물이 내는 소리와, 그릇이 부딛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허기지고 다급한 비명같은 소리. 처음에는 작게 들리던 그 소리가 점점 박자를 맞춰 크게 들렸다. 그 환청에 가위눌려 일어났다. 고개를 돌리니 어머니는 자고 있었다.
다시 누워, 어머니의 고향 몽골을 생각했다. 티비와 책에서 본 파란초원과 하얀하늘을 떠올리며 그 평원과 하늘에 어머니를 방류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좋지않은 장소와 시간에 사지가 갈려지고있는 사람아닌 다른 생물처럼 느껴졌다. 애초에 사람이 아니라, 그 다른 무언가에서 생겨난 것이라, 이처럼 저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 생물의 밑에서 나온 나도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녹아서 없어지고 싶다. 애초에 여기 있지 않았을 어머니가 다시 당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면, 그녀의 결과인 나 또한 원래 없었을 것처럼, 내가 누워있는 바닥에 나의 옷만남기고, 원자처럼 붕괴되고 싶었다. 점퍼를 입고 누워서 그런지 겨드랑이와 가슴팍에서 땀이 났다. 봄이되어 밤이 춥지않았다. 외투를 벗어 옆으로 치워놓고 다시 누웠다. 내일부터 다시 일거리를 알아보아야 할것이다. 오늘은 징기스칸과 활쏘는 꿈을 꾸고 싶다. 어머니는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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