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27, 2010

김훈이 아들에게 쓰는 글 2


제 생각에 김훈은 그의 문체나,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무래도 역사소설이나 고전문학의 비평에 어울리는 것 같지만, 가장 좋아하는 김훈의 글은 에세이집 '풍경과 상처' 후반부에 나오는 천상병시인에 관한 글과 '바다의 기별'에 실린 박경리를 생각한 글입니다. 천상병과 김훈, 둘은 얼굴을 자주보곤 한 것 같은데, 천상병 시인의 절절한 생활과 시인에 대한 김훈의 사랑스런 시선과 그리움이 그의 글에 녹아있습니다. 시인의 입주변에 끼인 백태의 묘사가 읽는 저에겐 너무나 강렬해서 천상병 시인을 생각하면 백태가 떠오르고, 백태를 생각하면 천상병시인이 연상될 정도입니다.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도 좋게 읽은 글들중 하나 이고, 김훈의 글들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글들중에 하나라 생각합니다. 글을 읽다보면 아들이 청소년기에 느꼈을 압박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러면서도 뼈가 굵고 살이 붙은 아들의 육체를 보는 아버지의 물컹한 마음이 와닿습니다. 매번 만경강하구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탄식을 내뱉는 작가의 모습과 겹치는 것이, 김훈이라는 작가와 글을 한꺼풀 벗겨보면 속수무책으로 가녀린 여인같음을 또 한번 느끼게 되더군요.

딸에 대해 적은 에세이도 한편 있습니다. 포유류 암컷의 씨내림의 슬픔과 딸이 커가는 삶에 대한 경이를 적은 글인데, 그 글에서도 김훈의 글에서 자주 써먹은 "어깨가 둥근"이라는 묘사가 나와 킥킥대며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는 앞서 말했듯이 군복무를 피하고 싶어하는 아들에게 훈계하는 아버지의 메세지입니다. 남한에서 태어난 남자라면 거의 대부분이 행하는 군복무가 뭐가 대단하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한국에서 아들로 태어난 이들과 그들의 아버지들이라면 대부분은 한번쯤 겪어보았을 심상일겁니다. 만약 제 아들이 저에게 군입대를 앞두고 오묘한 눈빛을 보내면, 전 김훈이 쓴 이 글보다 더 잘 쓸 자신이 없어, 이 글을 보여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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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새벽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전화 한 번 없는 너를 기다리며 나는 지금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과 분노를 느끼며 이글을 쓴다. 이 짧은 글을 마치기 전에 대문에 벨소리가 나고 네가 들어오기를 나는 바란다. 하루 종일 집안일에 시달린 너의 어머니도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다.

너는 재미도 없고 신명이 날 리도 없는 국어, 영어, 수학에 주눅들려 노예만도 못한 고등학교 시절과 재수시절을 거쳐서 겨우 대학에 들었갔다. 그러나 너의 젊은 몸의 생명력은, 국.영.수로 너의 정신을 옥죄고 경쟁과 싸움으로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어버린 어른들의 제도보다 힘센 것이어서, 너의 몸은 청년의 건장함으로 자라났다. 지난번 이삿짐을 나를 때도 너는 이미 아버지보다 훨씬 힘이 좋았다. 그리고 너는 징병 심체검사에서 현역복무 판정을 받았고, 이제 입영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이나 국회의원, 장관, 그리고 온갖 돈 많고 권세 높은 댁 도련님들이 무슨 사유에서인지 관행적으로 병역을 면제받아 왔다는 신문기사를 매일 같이 눈독 들여 읽고 있는 너의 눈치를 보면서, 나의 그 참담함은 이 나라의 무수한 힘없는 아버지들의 참담함이었을 터이다. 내가 아들인 너의 눈치를 보면서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너는 결국 너의 그 별것도 아닌 평발 증세를 너의 어머니께 강조하면서 재심받을 방법을 찾아달라고 말했다.

나와 너의 어머니는 다만 무력하게 한숨을 쉴 뿐 아무런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너를 낳아서 청년이 되도록 길렀으며, 남자로 태어나 함께 병역의 의무를 진 내가 너에게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이 나라의 어느 아버지가 징집을 앞둔 아들에게 이 사태를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병역은 남자로 태어난 국민의 가장 신성하고 가장 도덕적인 의무라고 말한들 이미 더럽혀지고 허물어진 신성 앞에서 그 말이 무슨 씨가 먹힐 것인가.

네가 네 또래 녀석들과 어느 엄습한 술집 골목이나 헤매면서 분노와 혼란의 풋술을 마시고 있을 이 새벽에, 나는 너의 교육과정과 성인의식과도 같은 입대 예비과정에서 나라의 제도와 사회, 그리고 남 앞에서 애국적 언동을 해 보이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권세 높은 자들이 너의 그 짧은 생애에 가한 모욕을 생각하면서 잠들지 못한다.

너에게 할말은 아니다만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너를 기르던 세월 속에서 내가 치러야 했던 가혹한 노동과 날이 밝도록 일했던 수 많은 밤의 고난을 생각했다. 세금을 원청징수 당하고, 34개월의 병역을 치르고, 예비군, 민방위 훈련에 참가하고, 교통규칙을 지키고 전기를 절약하고 쓰레기를 줄이고.... 시간외 노동을 밥 먹듯이 하면서도 나라가 시키는대로 끝까지 머리 숙여 모든 일을 다 해온 세월은, 지금 견딜 수 없이 허망하다.

나라를 지키는 일은, 아버지세대가 늙으면 아들 세대가 물려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사인인 아버지가 사인인 아들에게 넘겨주는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공적 아버지와 국가와 국민의 이름으로 이루어 질 수 밖에없다. 그러나 지금 너희들의 그 울분에 찬 새벽 술자리에 공사 간에 어느 아비가 끼어들수 있겠느냐, 아들아, 나는 겨우 이렇게 말하려한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 못난 나라의 못남 속에서 결국 살아내야 한다는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나라의 쪽박을 깨지 않는 일이라고, 너의 의무는 몇몇 비굴한 이탈자에 의하여 신성이 모독 되었지만 송두리째 부정당한 것은 아니라고, 너는 어머니께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 아프고 괴롭겠지만 나라의 더 큰 운명을 긍정하는 사내가 되거라. 네가 긍정해야할 나라의 운명은 너와 동년배인 동족 청년과 대치하는 전선으로 가야하는 일이다. 가서 대통령보다도 국회의원보다도 그리고 애국을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도 더 진실한 병장이 되어라.


1 comment:

  1. 어디선가 김훈에게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없다고 본다, 그게 특히 여자라면.이라는 말을 듣고 굉장히 불쾌했었는데 저는 지금 이글을 보더라도 '아들'과'남자'에게만 한정된 말씀을 하고 계신게 아니라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함부로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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