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기간은 약 3주였다. 절단된 부위와 수술의 무지막지함에 비하여, 병원 생활과 치료과정은 상당히 단조로웠다. 내가 있었던 8인실은 대부분 중장년층과 노인들이었고, 6시 30분에 기상해서 10시 30분에 잠드는 라이프 사이클이었다. 수술후 이틀간은 사고와 수술의 아픔과 공포로 몸져누웠지만, 삼일째 아침부터는 생각을 조금 고쳐먹었다. 몸을 굴려먹기로 했다. 담배를 끊기로 하였다. 피로감으로 드는 낮잠은 허용하였다. 하지만 무료함으로 인한 수면은 경계했다. 맛이라곤 찾을 수 없는 저염식 환자식단을 빠지지 않고 먹었다. 아침 점심 저녁, 병원에서 주는 음식말곤 입에 대지 않았다.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면서 싸들고온 과자와 음료수는 그대로 다음번 찾아온 다른 사람들에게 건냈다. 병원에서 주는 것 외에 따로 챙겨 먹은 건 오직 식사후 의무적으로 챙겨먹었던 아몬드였다.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 식사 후 무조건 직접 휠체어를 몰고 병원1층 로비옆에 있는 편의점에서 신문을 직접사서 읽었다. 꾸준히 꼬박꼬박 책을 읽었다. 입원해서 읽은 책은 정말 잘 읽힌다는걸 다시한번 깨달을수 있었다. 매일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양치질은 다섯번씩하였다. 부러 가족들의 병간호를 다 물리쳤다. 혼자 있는게 더 평온했다. 이 모든 것들은 신체의 구속에서, 내가 할수 있는 자기 방어이자 재활의 첫번째 스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은 찾아오고, 밤마다 불안에 시달린건 어쩔수 없었다. 낮동안 잠잠하던 고통들이 밤이되면 꾸물럭거리며 발에서 다리로, 다리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전신을 점령했다. 수술 후 일주일동안은 아파서 깊은 잠을 자지 못했고, 그 뒤 일주일은 불쾌한 생각들이 단잠을 방해하였다. 그것들은 자기들끼리 새끼를 쳤다. 불안함 뒤로 외로움이 엄습했고 외로움뒤엔 분노와 두려움이 병렬로 나를 방문했다. 기도를 할까 했지만 기도할 대상이 없었다. 기도대신 자기다짐을 하였다. 아프고 외로운 밤들이었다. 다른 환자들과, 그들의 보호자들이 자면서 뒤척이는 소리와, 신음소리가 적막을 깰 수 있었다. 8인실이 마음에 드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잠이 깨거나 혹은 생각으로 뒤척일 때면 정신을 비우고 잘린후 꿰맨 정맥으로 피가 지나가고, 다시 근육조직이 엉겨붙고 환부의 인대와 힘줄이 빳빳하게 당겨지며 새로이 매듭짓는 상상을 했다. 도움이 될지 안될지는 모르지만, 그것만이 할수 있는 전부였다.
몸이 재생되고, 살이차오르고, 다시 뛰고 걷게되는 상태까지 근육과 인대가 가다듬어지는 상상을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매일하기로 했다. 근육의 결과 골격의 구조는 모르지만 도움이 되길 바랄뿐이었다. 일주일이 되어갈 무렵부터 운동을 하였다. 다리는 쓰지않고, 윗몸일으키기와 푸쉬업과 이두근과 삼두근 운동을 하였다. 운동기구가 없어 병문안온 사람들이 가져온 병음료수 통을 썼다. 어깨운동을 하기위해 적당한 무게감의 아령의 대용품을 찾을 때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열대'와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 전기가 눈에 들어왔다. 꽤 괜찮은 대용품이 되었다. 운동은 아침을 먹고 오전시간에 한 타임, 점심을 먹고 오후 시간에 한타임씩 하였다. 하루에 두번씩 붕대를 감은 다리를 이끌고 샤워를 할 수는 없으니 오후 시간에 본격적인 운동을 하였다. 입원 후 일주일이 지나니 나트륨과 쓸데없는 탄수화물섭취를 줄이니, 몸의 붓기가 빠지는걸 느낄수 있었다. 병문안을 오면 항상 웃었다. 재밌고 쾌활한 이야기만을 하였다. 나의 성격이 원래 그러했지만, 의도하였다. 친구들을 웃기고 간호사들을 웃기려하였다. 부상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나에게 가장 큰 동료는 "젊음"이었고 다음이 "긍정"이었다. 웃기위해 노력했다.
삼주간의 입원기간동안 즐겨마셨던 맥주보다, 10여년을 넘게 태운 담배보다, 기름진 음식보다 생각나는건 진한 커피였다. 커피믹스말고, 커피샵에서 파는 커피. 아침에 일어나 생각나고, 운동을 하고나서 생각났고, 휠체어에 앉아 병원 옥상에서 해지는 저녁놀에 또 생각났다. 병원밑에 커피샵이 없어 은근히 구하기 어려운 음식이 된 커피를, 친구들이나 지인들한테 올때마다 항상 부탁했다. 아메리카노로, 진하게, 큰 사이즈로. 내가 카페인에 절여져 살았다는걸 입원을 하고서야 알게되었다.
난 내 몸의 살들이 아물고 근육이 붙는 속도와 신비에 경악했다. 뼈만남은채 덜렁거렸던 부위는 공업용 미싱에 재봉당한 듯이 꼼꼼하게 꿰매지고, 다시 힘이 들어가고 감각이 돌아오는데에 보름이란 시간이 걸렸다. 절반은 젊어서고, 나머지 반은 평소의 운동과 몸상태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신체에 감탄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보름이 지나서야, 잠을 푹잘수 있었다. 밤늦어 병원침대 위에 누워서 엄지발가락을 까닥거릴때의 그 안도감, 감사함. 그리고 퇴원이었다. 퇴원 후, 깁스를 풀기전까지도 꾸준히 운동을 하였다. 저염분의 식사도 최대한 지키려 하였다. 강한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상상으로 다리가죽 밑에 있는 온갖것들이 치유되고, 정상으로 돌아오는 상상은 멈추지 않았다. 자기전 침대에 누워서 계속해서 상상했다.
수술은 잘 된 편이었다. 아니, 상당히 잘 된 편이라고 해야할것이다. 그래야 수술을 집도한 의사들에 대한 나의 감사함이 조금이라도 표현될것이다. 수술후 한달 뒤, 엄지에서부터 발목부근까지 사라질거라는 발등위의 감각은 다시 돌아왔다. 수술후 두달 뒤, 매일 3km씩 걸어도 다리가 멀쩡했다. 수술 후 세달 뒤, 다시 6km정도를 쉬지않고 내달렸을때,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몇달 만에 뛰어 놀란 심장과 근육과 내 호흡사이에, 그 사이에 잘린 내다리가 온전히 붙어있음이 너무도 고마웠다. 초가을날 저녁, 수영강변 저녁놀, 나의 오른발 - , 내것들아-
재활은 끝났다. 성공이었다.
재활은 끝났다. 성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