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18, 2012

소쇄원

광주버스 터미널에서 한시간마다 한 대씩 오는 버스를 타면 40분을 내리달려 담양 소쇄원에 도착한다. 눈내리는 1월에 소쇄원은 초록이 없고, 늘어선 정자들 가운데 눈이 쌓인다. 소쇄원은 조광조의 젊은 제자 양산보가 기묘사화 후, 담양에 낙향하여 지은 정자이다. 정치적으로 거세된 젊은 선비의 사원은 겨울날 더욱 불우하다.

양산보가 담양에 지은 정자는 그들의 사상적 부스러기이자 마스터베이션이었다. 그의 스승과 선배와 동무가 쫓았던 정치적 낙원과 고향에 내려와 지은 작은 정원의 간극에 대하여 당대 누구도 말하지 않았으나,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그의 스승이 여름 산맥같은 젊음과 순결함으로 이룩하려 했던 왕도와 성리학의 완전무결한 작동을 위한 나라는 조선반도와 사대문 안래 구현될 수 없었다. 그는 경복궁과 훈구파 대신들간의 정치적 싸움 끝에, 정치적 효용성을 다 소진당한 뒤 기묘사화에 쓸려갔다.

조광조는 조선 성리학의 이념적 정점이었다. 김훈의 말을 빌려 그는 '가장 완강하고 가장 순결한 복고주의의 힘으로 가장 미래지향적인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소학의 원칙주의를 체질화한 그는 이념과 현실의 차이를 긍정할 수 없었다. 조광조의 비극은 그 간극의 불인지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어려서 총명하였고, 젊어서 등고登高 하였다. 조선조 엘리트의 요람 성균관에서 독보적인 총아였으며, 중종 10년 문과에 급제한뒤, 중종 13년 정2품 사헌부 대사헌에 올라, 중종 14년에 유배지에서 임금이 내린 사약을 받아 경복궁으로 절한 뒤 죽었다. 그 뒤 조광조는 국운이 바스라질 조선조의 황혼 무렵까지 사림들로부터 성역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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