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의 에센스란 결국 그런 것이다.
당신이 그때까지 했던 모든 일, 하고 싶어했거아 싶어하지 않았던 일들, 그리고 했으면 좋았다고 생각하거나 안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일 들의 총합에 의해 결정된 무의식적인 순간이자, 순간적으로 척추신경을 타고 오르는 불꽃인 것이다. 고통은 그 뒤에 찾아온다.
Jan 28, 2012
김연수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인간의 수명이 70살이라고 할 때, 우리는
1. 38300리터의 소변을 본다.
2. 127500번 꿈을 꾼다.
3. 2700000000번 심장이 뛴다.
4. 3000번 운다.
5. 400개의 난자를 생산한다.
6. 40000000000개의 정자를 생산한다.
7. 540000번 웃는다.
8. 50톤의 음식을 먹는다.
9. 333000000번 눈을 깜빡인다.
10. 49200리터의 물을 마신다.
11. 563킬로미터의 머리카락이 자란다.
12. 37미터의 소톱이 자란다.
13. 331000000리터의 피를 심장에서 뿜어낸다.
할아버지는 4번과 7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손수 종이에다 계산을 했어. 이번에는 곱하기 문제가 아니라 나누기 문제였어.
540000÷3000=180
“하루에 사십이해일천이백만경 번 이산화탄소를 배출해내는 인간들로 가득 찬 이 지구에서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이 180이라는 숫자 때문이다. 인간만이 같은 종을 죽이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만이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180이라는 이 숫자는 이런 뜻이다. 앞으로 네게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테고, 그중에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이 일어나기도 할 텐데, 그럼에도 너라는 종(種)은 백팔십 번 웃은 뒤에야 한 번 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할아버지가 말했어.
“그러니 네가 유명한 작가가 된다면 우리 인간이란 백팔십 번 웃은 뒤에야 겨우 한 번 울 수 있게 만들어진 동물이라는 사실에 대해 써야만 하는 거야.”
Jan 18, 2012
소쇄원
광주버스 터미널에서 한시간마다 한 대씩 오는 버스를 타면 40분을 내리달려 담양 소쇄원에 도착한다. 눈내리는 1월에 소쇄원은 초록이 없고, 늘어선 정자들 가운데 눈이 쌓인다. 소쇄원은 조광조의 젊은 제자 양산보가 기묘사화 후, 담양에 낙향하여 지은 정자이다. 정치적으로 거세된 젊은 선비의 사원은 겨울날 더욱 불우하다.
양산보가 담양에 지은 정자는 그들의 사상적 부스러기이자 마스터베이션이었다. 그의 스승과 선배와 동무가 쫓았던 정치적 낙원과 고향에 내려와 지은 작은 정원의 간극에 대하여 당대 누구도 말하지 않았으나,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그의 스승이 여름 산맥같은 젊음과 순결함으로 이룩하려 했던 왕도와 성리학의 완전무결한 작동을 위한 나라는 조선반도와 사대문 안래 구현될 수 없었다. 그는 경복궁과 훈구파 대신들간의 정치적 싸움 끝에, 정치적 효용성을 다 소진당한 뒤 기묘사화에 쓸려갔다.
조광조는 조선 성리학의 이념적 정점이었다. 김훈의 말을 빌려 그는 '가장 완강하고 가장 순결한 복고주의의 힘으로 가장 미래지향적인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소학의 원칙주의를 체질화한 그는 이념과 현실의 차이를 긍정할 수 없었다. 조광조의 비극은 그 간극의 불인지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어려서 총명하였고, 젊어서 등고登高 하였다. 조선조 엘리트의 요람 성균관에서 독보적인 총아였으며, 중종 10년 문과에 급제한뒤, 중종 13년 정2품 사헌부 대사헌에 올라, 중종 14년에 유배지에서 임금이 내린 사약을 받아 경복궁으로 절한 뒤 죽었다. 그 뒤 조광조는 국운이 바스라질 조선조의 황혼 무렵까지 사림들로부터 성역화 되었다.
양산보가 담양에 지은 정자는 그들의 사상적 부스러기이자 마스터베이션이었다. 그의 스승과 선배와 동무가 쫓았던 정치적 낙원과 고향에 내려와 지은 작은 정원의 간극에 대하여 당대 누구도 말하지 않았으나,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그의 스승이 여름 산맥같은 젊음과 순결함으로 이룩하려 했던 왕도와 성리학의 완전무결한 작동을 위한 나라는 조선반도와 사대문 안래 구현될 수 없었다. 그는 경복궁과 훈구파 대신들간의 정치적 싸움 끝에, 정치적 효용성을 다 소진당한 뒤 기묘사화에 쓸려갔다.
조광조는 조선 성리학의 이념적 정점이었다. 김훈의 말을 빌려 그는 '가장 완강하고 가장 순결한 복고주의의 힘으로 가장 미래지향적인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소학의 원칙주의를 체질화한 그는 이념과 현실의 차이를 긍정할 수 없었다. 조광조의 비극은 그 간극의 불인지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어려서 총명하였고, 젊어서 등고登高 하였다. 조선조 엘리트의 요람 성균관에서 독보적인 총아였으며, 중종 10년 문과에 급제한뒤, 중종 13년 정2품 사헌부 대사헌에 올라, 중종 14년에 유배지에서 임금이 내린 사약을 받아 경복궁으로 절한 뒤 죽었다. 그 뒤 조광조는 국운이 바스라질 조선조의 황혼 무렵까지 사림들로부터 성역화 되었다.
Jan 13, 2012
알면 사랑한다 - 최재천
정은임의 FM 영화음앙을 팟캐스트로 다시 접하게 된지 반년이 지났다. 92년 첫 방송을 시작하였으니, 지금 시점으로 20년이 지난 셈이다. 많은 시간 뒤에 지금 다시 그녀와 게스트, 아니 정성일과 그녀가 나눈 대화를 듣다보면, 그들이 언급하며 긍정적으로 전망한 배우와 감독의 직업적 성취가 대부분 맞아 떨어졌다는데에 놀란다. 정성일은 그의 말을 빌려 영화에 일생의 사랑을 건 사람이며, 정은임은 대화를, 영화를, 그리고 주변과 세상에 대해 깊이 경청할 수 있는 전투력의 소유자였다.
한 평생을 영화로 소비한 정성일은 사랑하여 알게되었응 것이고, 정은임은 그녀의 '듣는' 재능으로 알게되면서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나오는 집중과 몰입은 <정영음> 이 다른 좋은 라디오 프로그램보다 더욱 좋은 무언가가 되도록 만들었다.
한 평생을 영화로 소비한 정성일은 사랑하여 알게되었응 것이고, 정은임은 그녀의 '듣는' 재능으로 알게되면서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나오는 집중과 몰입은 <정영음> 이 다른 좋은 라디오 프로그램보다 더욱 좋은 무언가가 되도록 만들었다.
Jan 5, 2012
김추자, 장진영
"..대학교 신입생 노래자랑에서 1위를 하였고, 그 해 신중현의 녹음실로 찾아갔다. 신중현은 김추자의 노래를 듣고 곡을 주었고, 1969년 데뷔 음반이 발표되었다. 가창력과 섹시한 춤을 겸비한 김추자는 197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고,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유행어까지 생겼다"
"대부분 신중현이 작곡한 김추자의 음악은 신중현이 추구하던 한국적 록이었다. 사이키델릭 록처럼 당시 유행하던 트로트와 차별되는 현대적인 음악에 한국적인 요소를 섞은 음악이었다." - 위키피디아 김추자 항목 -
사람의 목소리는 경험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추억을 끌어당겨준다. 사람의 목소리에는 생명의 지문이 찍혀 있다. 이 지문은 떨림의 방식으로 몸에서 몸으로 직접 건너오는데, 이 건너옴을 '관능'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내가 타자의 목소리를 들을 때, 나는 타자를 경험하는 것이다.
김추자는 어떤가. 김추자는 어지럽다. 김추자 목소리의 본질은 환각과 도발이다. 김추자의 여성성은 내연기관처럼 끊임없이 폭발하고 배기한다. 이 폭발의 절정이 음악적 기율로 통제될 때가 김추자의 가장 좋은 순간들이다. 사랑을 노래할 때 김추자의 목소리는 사랑을 손짓해 부르기보다는 사랑을 부르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가열차게 터뜨려버린다. 그래서 김추자의 노래는 상대가 없는 독백처럼 들린다. 이 독백은 맹렬한 독백이다. 이것이 김추자의 도발이다.
故 장진영이 김추자를 다룬 영화에 출연할뻔 했었다는 사실을 들었을때 매우 안타까웠다. 김추자의 광대와 장진영의 볼테가 서로 허물어져, 그의 영화에서 피어날 김추자를 상상했다. 매니저에게 소주병으로 얼굴을 찍히고, 안무와 가사로 인해 파견 간첩이라는 블랙코미디를 생산해냈던, 그 옛날의 김추자. (물론 그런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배우의 역량 보단 감독의 역할이 지대하니, 그런 결과물이 나오지 못하였을수도 있을것이다.) 장진영은 암투병으로 죽었고, 김추자는 아직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것이다.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Jan 3, 2012
무기의 땅, 악기의 바다 - 김훈
세계를 개조하려는 열망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무기의 꿈과 악기의 꿈은 다르지 않다.
4번 국도는 경주 시내에서 토함산을 가로지르며 동쪽으로 나아가 감포 바다에 닿는다. 토함산 권역을 거의 벗어나는 어일리에서 4번 국도를 버리고 우회전하면 929번 지방도로이다. 929번 지방도로는 토함산 능선을 오른쪽으로 펼쳐보이며 7킬로미터를 동남쪽으로 달려 감은사지 앞을 지나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의 바다에 닿는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그 종착점 너머의 세계와 연결된다. 길은 길이 아닌 곳과 닿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길의 지향성은 세계적이며, 모든 길의 숙명은 역사적이다. 929번 지방도로는 경주와 감포읍 대본리의 바다를 잇는다. 이 한 도막 지방도로는 바다를 향하는 7세기 신라의 인후(咽喉)이며, 인간의 꿈의 힘으로 살육의 피를 씻어내던 신라의 지성소(至聖所)이다. 인간은 아늑하고 풍성한 곳에서 다툼 없이 살고 싶다. 낯설고 적대적인 세계를 인간의 안쪽으로 귀순시켜서, 그렇게 편입된 세계를 가지런히 유지하려는 인간의 꿈은 수천 년 살육 속에서 오히려 처연하다. 세계를 개조하려는 열망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무기의 꿈과 악기의 꿈은 다르지 않다. 철제 무기의 경이로운 날카로움을 정련해가던 가야의 마지막 날들에, 우륵은 가야금을 완성한다. 그의 조국은 한 줄기 산세와 한 줄기 물길에 기대어 있던 부족 국가였다. 위태로운 조국의 마지막 순간에 우륵은 가야금을 들고 조국을 떠난다. 그는 적국인 신라의 진흥왕에게 투항했다. 그가 버린 조국의 이름은 그의 악기에 실려 후세에 전해졌고, 그의 악기는 신라 천년의 음악 바탕을 이루었다. 진흥왕의 팽창주의는 그가 남긴 순수비에 적혀 있는데, 아마도 역사 속에서, 진흥왕의 무기와 우륵의 악기는 비긴 것 같다.
7세기의 929번 지방도로에서, 전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꿈은 무기에서 악기로 이행하고 있다. '삼국사기' 속의 7세기는 '수급 5백을 베었다' '수급 1천을 베었다' '수급 3천을 베었다' 는 문장의 끝없는 연속이다. 자고 새면 베고 베이는 것이다. 수사적 장치가 전혀 없이 발가벗은 단문으로 기록되는 그 '목 베기 시대'는 철제 무기의 성능 시험장 같은 인상을 준다. 통일 전쟁의 총사령관인 김유신 자신이 철제도끼를 들고 사기(史記)에 등장한다. 고전적 단순성에 엄격한 김부식의 문장은 떨어져나간 목의 개수를 챙길뿐, 떨어져나간 목의 고통을 기록하지 않는다. 매일매일의 목 베기와 목 베기 사이에서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던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기사는 가엾고 사소한 에피소드처럼 끼어 있다. 7세기의 수많은 전투는 매우 복잡하고도 무질서한 정치적 배후를 갖는다. 정치 집단들 사이의 호혜 평등에 따른 공존이란 불가능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잔존 군사력과 당(唐)의 원정군이 뒤엉켜 가변적 적대 관계의 중층 구조를 이루었다. 나-당 사이의 정치관계와 군사관계는 파국적인 모순에 처해 있었다. 문무왕은 눈물겨운 저자세의 외교 문서를 당의 황제에게 보내 당나라의 도덕성과 우월성에 영원히 충성을 맹세한다. 그는 거의 빌고 있다. 그리고 그는 곧 군사를 동원해서, 한반도에 진주한 당의 군사력을 토벌한다. 수사를 아끼는 김부식은 그 시대의 피비린내를 이렇게 전한다.
"들판마다 시체가 가득가득 쌓여 있었고, 흐르는 피에 방패가 떠내려갈 지경이었다"
문무왕의 유서는 '삼국사기' 전편에서 가장 장엄하고도 웅장한 글이다. 그 유서는 제왕의 문장으로 기록된 무기의 꿈이다.
"나는 국운이 마침 어지럽고 전쟁하는 시대를 당하여 서쪽(백제)를 정벌하고 북쪽(고구려)을 토벌하여 능히 강토를 평정하고, 반역한 자를 치고 협조한 자를 불러와서 드디어 먼 곳과 가까운 곳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이 돌보아주심을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아비와 아들의 오래된 원한을 갚아주었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을 널리 추상하여 내외에 관직을 고루 나누어주었으며, 병기를 녹여 농구를 만들었고, 백성들을 인수(仁壽)의 경지로 이끌었다. " - '삼국사기' 이재호 옮김
문무왕의 단정적 어법에도 불구하고 무기에 대한 그의 꿈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먼 곳과 가까운 곳은 끊임없이 불안정했고, 살육과 모반은 거듭되었다.
7세기의 바다에서 악기가 솟아오른다. 그 바다는 929번 지방도로가 끝나는 감포읍 대본리 바다이고, 그 악기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이름의 관악기이다. 문무왕의 시신은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그 뼈까 대본리 앞바다 바위(대왕암)에 뿌려졌고, 문무왕은 동해에서 호국의 용이 되었다. 그리고 이 피리는 신문왕이 그의 아버지 문무왕의 혼백인 용으로부터 받은 피리였다. 용은 바다에서 솟아난 그 피리를 아들에게 전해주었다. '삼국유사'는 인간의 욕망과 슬픔과 기쁨과 환상과 열망에 역사라는 지위를 부여한다. '삼국유사'는 현실의 역사이며 마음의 역사인 것이다. 만파식적에 대한 기록이 없었더라면, 7세기의 역사는 살육과 모반으로 지고 샌 불구의 역사에 불과했을 터이다. 삼국 통일이 어찌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왕이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간직해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떄는 개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다. 이피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 - 삼국유사. 이재호 옮김
4번 국도는 경주 시내에서 토함산을 가로지르며 동쪽으로 나아가 감포 바다에 닿는다. 토함산 권역을 거의 벗어나는 어일리에서 4번 국도를 버리고 우회전하면 929번 지방도로이다. 929번 지방도로는 토함산 능선을 오른쪽으로 펼쳐보이며 7킬로미터를 동남쪽으로 달려 감은사지 앞을 지나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의 바다에 닿는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그 종착점 너머의 세계와 연결된다. 길은 길이 아닌 곳과 닿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길의 지향성은 세계적이며, 모든 길의 숙명은 역사적이다. 929번 지방도로는 경주와 감포읍 대본리의 바다를 잇는다. 이 한 도막 지방도로는 바다를 향하는 7세기 신라의 인후(咽喉)이며, 인간의 꿈의 힘으로 살육의 피를 씻어내던 신라의 지성소(至聖所)이다. 인간은 아늑하고 풍성한 곳에서 다툼 없이 살고 싶다. 낯설고 적대적인 세계를 인간의 안쪽으로 귀순시켜서, 그렇게 편입된 세계를 가지런히 유지하려는 인간의 꿈은 수천 년 살육 속에서 오히려 처연하다. 세계를 개조하려는 열망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무기의 꿈과 악기의 꿈은 다르지 않다. 철제 무기의 경이로운 날카로움을 정련해가던 가야의 마지막 날들에, 우륵은 가야금을 완성한다. 그의 조국은 한 줄기 산세와 한 줄기 물길에 기대어 있던 부족 국가였다. 위태로운 조국의 마지막 순간에 우륵은 가야금을 들고 조국을 떠난다. 그는 적국인 신라의 진흥왕에게 투항했다. 그가 버린 조국의 이름은 그의 악기에 실려 후세에 전해졌고, 그의 악기는 신라 천년의 음악 바탕을 이루었다. 진흥왕의 팽창주의는 그가 남긴 순수비에 적혀 있는데, 아마도 역사 속에서, 진흥왕의 무기와 우륵의 악기는 비긴 것 같다.
7세기의 929번 지방도로에서, 전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꿈은 무기에서 악기로 이행하고 있다. '삼국사기' 속의 7세기는 '수급 5백을 베었다' '수급 1천을 베었다' '수급 3천을 베었다' 는 문장의 끝없는 연속이다. 자고 새면 베고 베이는 것이다. 수사적 장치가 전혀 없이 발가벗은 단문으로 기록되는 그 '목 베기 시대'는 철제 무기의 성능 시험장 같은 인상을 준다. 통일 전쟁의 총사령관인 김유신 자신이 철제도끼를 들고 사기(史記)에 등장한다. 고전적 단순성에 엄격한 김부식의 문장은 떨어져나간 목의 개수를 챙길뿐, 떨어져나간 목의 고통을 기록하지 않는다. 매일매일의 목 베기와 목 베기 사이에서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던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기사는 가엾고 사소한 에피소드처럼 끼어 있다. 7세기의 수많은 전투는 매우 복잡하고도 무질서한 정치적 배후를 갖는다. 정치 집단들 사이의 호혜 평등에 따른 공존이란 불가능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잔존 군사력과 당(唐)의 원정군이 뒤엉켜 가변적 적대 관계의 중층 구조를 이루었다. 나-당 사이의 정치관계와 군사관계는 파국적인 모순에 처해 있었다. 문무왕은 눈물겨운 저자세의 외교 문서를 당의 황제에게 보내 당나라의 도덕성과 우월성에 영원히 충성을 맹세한다. 그는 거의 빌고 있다. 그리고 그는 곧 군사를 동원해서, 한반도에 진주한 당의 군사력을 토벌한다. 수사를 아끼는 김부식은 그 시대의 피비린내를 이렇게 전한다.
"들판마다 시체가 가득가득 쌓여 있었고, 흐르는 피에 방패가 떠내려갈 지경이었다"
문무왕의 유서는 '삼국사기' 전편에서 가장 장엄하고도 웅장한 글이다. 그 유서는 제왕의 문장으로 기록된 무기의 꿈이다.
"나는 국운이 마침 어지럽고 전쟁하는 시대를 당하여 서쪽(백제)를 정벌하고 북쪽(고구려)을 토벌하여 능히 강토를 평정하고, 반역한 자를 치고 협조한 자를 불러와서 드디어 먼 곳과 가까운 곳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이 돌보아주심을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아비와 아들의 오래된 원한을 갚아주었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을 널리 추상하여 내외에 관직을 고루 나누어주었으며, 병기를 녹여 농구를 만들었고, 백성들을 인수(仁壽)의 경지로 이끌었다. " - '삼국사기' 이재호 옮김
문무왕의 단정적 어법에도 불구하고 무기에 대한 그의 꿈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먼 곳과 가까운 곳은 끊임없이 불안정했고, 살육과 모반은 거듭되었다.
7세기의 바다에서 악기가 솟아오른다. 그 바다는 929번 지방도로가 끝나는 감포읍 대본리 바다이고, 그 악기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이름의 관악기이다. 문무왕의 시신은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그 뼈까 대본리 앞바다 바위(대왕암)에 뿌려졌고, 문무왕은 동해에서 호국의 용이 되었다. 그리고 이 피리는 신문왕이 그의 아버지 문무왕의 혼백인 용으로부터 받은 피리였다. 용은 바다에서 솟아난 그 피리를 아들에게 전해주었다. '삼국유사'는 인간의 욕망과 슬픔과 기쁨과 환상과 열망에 역사라는 지위를 부여한다. '삼국유사'는 현실의 역사이며 마음의 역사인 것이다. 만파식적에 대한 기록이 없었더라면, 7세기의 역사는 살육과 모반으로 지고 샌 불구의 역사에 불과했을 터이다. 삼국 통일이 어찌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왕이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간직해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떄는 개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다. 이피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 - 삼국유사. 이재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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