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튀세르는 자서전에서 '자기 변명을 늘어놓지 않는 것'이야말로 "유물론에 대한 유일한 정의(定義)"라고 적었다. 우리에게는 이 말이 마치 '김훈 소설에 대한 유일한 정의'처럼 보인다. 그의 소설은 자기변명을 늘어놓지 않기 위해 고투하는 유물론자의 고백이다. 그 유물론은 좌파와 우파를 모른다. 좌파와 우파에게는 언제나 되돌아가 기댈 수 있는 이념이 있다. 그 이념에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을 부정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김훈에게 이념이 있다면 그것은 '
이것이 우리에게 그가 필요한 이유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인간주의와 얼마나 많은 역사주의가 있는 것인가. 김훈은 그런 것들이 세상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다는 신념에 회의적이다. 그래서 인간을 긍정하지 못하면서 인간을 말하고, 역사를 믿지 못하면서 역사소설을 쓴다. 이 역설이 김훈 소설의 힘이다. 그 역설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치열하게 동어반복한다. 역설이 아닌 것은 세계가 고통 속에 있다는 사실 뿐이다. "고통의 절대성만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온 유일한 것이다."(아도르노) 고통은 보수와 진보의 너머에 있고 어쩌면 그 고통에 가닿는 길도 보수와 진보의 너머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여전히 유물론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고통의 유물론이어야 한다. "나는 아무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서문', 남한산성) 김훈의 소설은 끝나지 않는 고통 앞에서 우는 울음이다. 이 울음이 인간과 역사에 대한 필사적인 진정성의 표현이자 순도 높은 예의가 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신형청, 몰락의 에티카 - 속지않는 자가 방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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